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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벋으훈 May 07. 2020

"볶음밥에는 고기가 없고 짜장에만 있어요."

채식 지향인이 겪은, 혹은 겪는 일화

    난 포유류를 안 먹는다. 가금류도 웬만해선 안 먹는다. 한 달에 한 번 먹을까? 부채감을 안고서 그 하루를 기억하며 섭취한다. 그러면서도 유제품이나 달걀은 줄였으나 중단은 못한 채식 지향인(소위 채식주의자)이다. 쉽게 말해선 비덩주의자나 페스코 혹은 폴로에 가깝다. 채식의 이유나 의의는 아마 다른 글로 자세히 쓰는 날이 오겠지만 간단히 축약하자면 식탁에서 생태계를 환기하려는 시도다.

    채식주의자를 향한 배려섞인 시선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굳이 알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배려가 주변인들이게서 유난 떤다는 시선을 유발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애초에 그 이유에 대해 묻지도 않고 공감도 안 한다면 '굳이 왜 하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배려를 해줘도 불만이라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필요한 배려는 식사를 같이 안 하거나 알아서 뭘 빼고 안 먹든 상관하지 않거나 혹은 이유를 진지하게 묻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비건이 아닌 이상 웬만해서는 티가 잘 안 난다. 치맥과 고깃집만 피하면 알릴 이유가 없다. (둘을 피해야 하면 티가 날 수밖에 없는 건가)


    어느 단체에 소속된 채 식사를 몇 번 하는 동안에도 알리지 않았다. 큰 지장은 없었다. 음식 선택권이 없었지만 가도 먹을 수 있는 메뉴가 꽤 있었다. 사람들과 사귀어야 하는 시기라 식사를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5.6)은 중국집을 가야했다. 고급식당이 아니고선 고기 없는 메뉴를 고르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전화로 미리 메뉴를 주문하자길래 어떤 걸 골라야할지 주저했다. 위기였다. 돌이켜보건대, 그냥 안 갔어야했다.

    전화를 거는 동료에게 고기가 안 들어간 볶음밥을 주문해달라 부탁했다. 그래서 동료는 만약 그런 메뉴가 없으면 고기를 빼달라고 해주겠다 말했다. 이 과정은 동료와 나, 둘 사이에 은밀하게 진행됐기에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식당에 갔다. 자리마다 메뉴가 준비돼있길래 종업원 분께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고기 안 들어간 볶음밥은 어디 있죠? 그러자 이 식당의 볶음밥엔 고기가 전부 안 들어간다고 답했다. 짜장이 저렇게 잔뜩 묻혀 있는데 무슨 말인가 싶었다. "짜장은요? 고기 들어간 거 아니에요?" 아 짜장은 안 드시면 되지 않냐고 덜어서 다시 주겠다며 날 쳐다봤다. 종업원의 표정엔 악의가 없었고 그저 의아한 표정으로 꿈벅거리는 눈이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아~**님 채식하는구나" 표정관리가 안 됐다. 종업원과의 실랑이를 더 벌일 수도 없었다. 이미 나는 드러나버렸다. 곧 매번 되풀이되는 대화를 하게 되겠지. 자리에 앉았다. "아 다른 건 먹어요?" "비건이에요?""우린 그런 거 신경 안 써요""아 근데 저번에 샤브샤브 먹지 않았나?" 채식한다는 걸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유난 떤다고 생각할 거라고. 한 공간에 배려가 차지하는 영역이 그렇게 크지 않은 것 같다고. "아이고 **님 오늘 그럼 커밍아웃한 거네 그럼 채식 커밍아웃 깔깔"


    짜장을 염두했는지 고돌고돌하게 날리는 밥과 함께 죄책감을 삼켰다. 채식을 실천한다는 얘기를 아주 겉핥기식으로 5분 내로 전달할 때면 두 종류의 죄책감이 든다. 비건이 아니라 전부 안 먹는 건 아니라고 말할 때 스스로가 초라해진다. 죽음과 고통을 또다시 외면한다. 비판하려는 타협적 태도를 답습하는 나를 돌아본다. 두 번째로는 어쨌든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인식 때문이다. 작정하고 상대의 육식을 비판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동물권 행진에서는 거리에서 소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사람과의 관계를 더 우선한다.  

 일단 나라도 안 먹자는 최소한의 신념이라도 지키며 일상을 살아갈 따름이다.(따라서 나는 활동가가 아니라 실천가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먹지 말자고 말하는 게 모든 시공간에서 작동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회의를 마치고 식당에서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선 채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나도, 그들도 안 돼있을 확률이 높다. 들을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겐 먹지 못할 음식처럼 먹지 말자는 주장은 듣지 못할 외국어일 테다. 

    스스로나 타인에게 미안하고 싶지 않아서 채식한다는 말을 잘 안 한다. 앞으로 이제 나는 그들의 시선 속에서 무언가를 먹게 될 것이다. "이건 먹어도 돼?"라는 순수한 궁금증에 기반한 질문에도 약간의 검열 느낌을 받겠지. 그정도는 감수해야지싶다. 이왕 미안하게 됐으니 밥 먹을 때마다 그들이 조금은 신경 쓰이길 바란다. 나란 존재가 찝찝함을 만들어 내서 날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 중에 한 명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안 먹어?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

    나도, 다른 사람들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채식 지향이라는 게 공개 됐다. 답할 기분도 준비도 안 되었지만 질문도 피상적이었다. 오늘 먹은 볶음밥이 소화가 안 되는 건 기분 탓일 것이다. 정말로 기분 탓인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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