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자의 책임 범위를 고민하며
2009년 1월 KBS 게시판에 사과글이 올라왔다. 당시 방영 중이던 <상상플러스> 제작진의 공식 사과였다. 며칠 전 방영분에서 방송인 신정환의 욕설(개XX)을 그대로 내보낸 것이다. 당시 시청자들은 제작진보다 출연자인 신정환을 더 비판했었다. 신정환이 더 나서서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에 실망을 시켜드리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라며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라며 거듭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방송에 대한 책임은 (생방송이 아닌 이상) 출연진보단 제작진에게 있다.
요즘 <아는 형님>이나 <라디오스타>와 같은 프로그램엔 ‘삐-’와 같은 자체 효과음으로 출연자의 욕설 사실을 그대로 내보낸다. 과거보다 욕에 대한 허용 기준이 낮아진 것도 있겠지만 편집될 거라 믿고 욕을 하는 경우도 있다. 비속어뿐만이 아니다. 08년도 7월엔 KBS <1박 2일>에 MC 몽의 흡연 장면이 방영돼 문제가 된 적도 있다. 그때도 제작진과 더불어 MC몽도 함께 뭇매를 맞았다. MC몽은 “두번 다시 담배를 피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MC몽은 당연히 편집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논란이 일어나면 제작진은 곧바로 사과한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레퍼토리가 자주 등장한다. 지난 26일 TV조선 <아내의맛>에서는 정동원에게 2차 성징여부에 대해 묻는 장면을 여과없이 내보냈다. 심지어 이를 더 강조해서 희화화했다. 후에 사과하고 삭제조치 했지만 제작 과정에서 문제 소지를 느끼지 못한 건 실망스럽다. 뒤에서 말할 MBC <놀면 뭐하니>의 ‘마오’ 발언도 그렇다.
일부러 문제 상황을 자초하기도 한다. 18년 5월 MBC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이영자 어묵 먹방에 쓰인 CG도 마찬가지다. 제작진은 “이를 인지하지 못하”게 된 점을 사과했다. 제작 과정 중 소홀했던 것인지 해당 밈(meme)이 어떤 맥락에서 사회에 통용되는지 알지 못했는지 알 수 없다. 사과문에 따르면 원인을 전자로 말했다. 전자면 제작자로서 실력 부족이고 후자면 제작자의 자질 결함이다.
그리고 일주일 전 22일, MBC <놀면 뭐하니>에서 ‘마오’ 발언이 시청자를 만났다. 정확힌 중국 시청자를 만났다. ‘환불원정대’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프로그램 컨셉에 맞게 새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마오’를 언급한 것이다. 중국 이름 어떠냐는 맥락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마오’는 ‘마오쩌둥’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됐다. 그로 인한 여파로 현재까지 이효리의 인스타그램엔 중국과 한국 네티즌들 간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과두 정치로 한국과 전혀 다른 정치 체제다.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를 공유하지만 그 또한 국가의 역할에서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중국인이 생각하는 ‘위인’은 한국과 다르다. 중국 네티즌은 ‘이순신’과 ‘세종대왕’을 들먹이면 한국 네티즌에게 굉장히 모욕적일 거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 위인들 중에 마오쩌둥은 더 특별하다. 그는 천안문 광장에 초상화가 걸릴 정도로 신격화된 건국 위인이다. 현 주석 시진핑이 제2의 마오쩌둥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마오쩌둥은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댓글 창 다툼에선 토론이나 논쟁보단 서로의 국가를 헐뜯는 데 혈안이 돼있다. 국가에 대한 모욕을 받아들이는 층위도 국가 간 다르다. 중국은 국가 모독을 부모를 비난한 정도로 여긴다.
이효리의 발언은 표현의 자유 측면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발언을 굳이 내보내야 했을까는 다른 문제다. 분명 마오쩌둥을 비하하거나 희화화할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의도와 무관하게 웃음을 유발할 목적으로 언급된 것 맞다. 이에 중국 네티즌은 불쾌함을 표할 수 있다. 게다가 인터넷 상에서 그 발언은 조롱 섞인 과정을 거치며 재생산 됐다. 이 전체 과정이 중국 네티즌에게 전달됐고 재생산 된 내용은 충분히 모욕적일 수 있을 테다. 현재 이효리 인스타그램엔 이번 사안을 떠나 서로 모욕하는 댓글만이 가득하다. 코로나 책임 져라! 중국 진출 꿈도 꾸지 마라! 그런데 그 난투장에 MBC 제작진이 보이지 않는다.
MBC 제작진은 사과문을 올리고 VOD에서 해당 내용을 삭제했다. 하지만 일차적 책임에서 끝나선 안 된다. 중국 네티즌들은 끊임없이 이효리의 사과를 요구한다. 이에 대한 책임까지 제작진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인터뷰>(2014)처럼 정권 신성화에 대한 비판 목적이 없었다면 ‘마오’ 발언은 편집 과정에서 뺐어야 한다. 어떤 의도든 이러한 분란을 일으켰을 거라 짐작했어야 한다. 그 발언을 한 이효리를 두고 구설수가 생길 것이란 걸 예상했어야 한다. 서로를 혐오하며 각국의 네티즌들이 똘똘 뭉치고 있다. 국가 간 자존심 싸움으로 흘러가버렸다. 이효리가 만약 조금이라도 사과하면 중국 눈치를 보다 굴복한 것처럼 또다시 입방아에 오를 판이다. <놀면 뭐하니>제작진의 책임이 사과에 그쳐선 안 된다.
‘환불원정대’를 기다려온 팬으로서 시작부터 논란이 휩싸였단 사실이 안타깝다. 제작진이 더 유의하며 ‘환불원정대’를 무사히 마칠 수 있길 응원한다. 제작자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으로서 시대에 맞는 변화와 끊임없는 고민이 요구된다. ‘선한 영향력’을 위해 ‘영향력’엔 책임감을 가지고 ‘선함’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 경험을 토대로 모든 방송사에서 더 성숙한 프로그램이 나오길 바란다. 그럴 것이라 믿는다.
무엇보다 <놀면 뭐하니> 제작진이 이효리에게 사과했길. 이효리가 지금의 논란을 홀로 헤쳐나가지 않게 그 옆에 제작진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어련히 잘하고 있겠지만!
▼MC몽, ‘1박2일’ 흡연 장면에 시청자 맹비난..“상식 밖 행동에 실망”(2008.7)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184086586472224&mediaCodeNo=258
▼방송 중 "개XX" 욕설 신정환 공개 사과(2009.1)
https://news.joins.com/article/3467223
▼MBC <전참시> ‘어묵 먹방’에 세월호 참사 보도 화면 사용 논란...제작진 사과 (2018.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05090948001
▼[오병상의 코멘터리] 이효리는 살아있는 중국권력을 건드렸다. (2020.8.25)
https://mnews.joins.com/article/23856782?cloc=joongang-section-realtimerecommend
▼이효리 마오 사태...연예계 글로벌 문화 감수성 필수 시대(2020.08.28)
http://www.viva100.com/main/view.php?key=202008270100048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