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가되다>(김원영.김초엽,2021)을 읽고 쓴 초단편픽션.
오늘은 화성으로의 이삿날이다. 2020년, 화성 탐사선을 여러 국가가 연이어 보낼 때까지만 해도 30년 만에 화성에 지구인이 정착할 수 있을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인류가 살 수 있는 행성을 찾기보다 화성에 적합하게 몸을 바꾸기로 한 접근 방식의 전환이 일종의 변곡점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화성인이 되고자 몸을 사이보그화했다. 그 과정에는 몇몇 희생이 따랐고 필연적이란 말도 꼬리표처럼 바짝 붙었다. 그 죽음을 기억하고 기리는 이들과 그 희생을 발판 삼아 기술을 발전시킨 이들이 2050년까지 함께 살고 있다.
모두가 사이보그화에 도전할 수는 없었다. 노인, 그러니까 75세 이상의 인간은 도전 요건이 나 같은 40대 청년보다 더 까다로웠다. 몸의 변화가 특정 나이를 넘으면 위험을 수반한다는 이유였다. 특히나 우리 엄마처럼 신체에 장애를 가진 노인은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지원 자격 박탈이랄까. 이미 건강한 이들만이 화성인으로의 사이보그화를 신청할 수 있었다. 물론 공짜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지구에서 신체 건강하게 살아온 돈 많은 사람들’만이 NMC에 입성할 수 있었다. 세계 공식 공용어가 된 영어를 따 화성의 첫 도시 이름이 정해졌다. New Mars City. 제국주의 용어를 연상케 하는 명명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계의 주장은 희생자들의 이름처럼 발전이란 이름 앞에 쉽게 지워졌다. 애초에 주류를 차지하지 못한 학자들이었다. 화성에 갈 수 있게 해 달란 장애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뒤로 밀렸다.
장애가 일상의 어떤 불편함을 주지 않도록 기술은 발전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비장애/장애’ 구분이 유효할 정도의 차이는 남았다. 화성인이 되는 과정처럼 인류 보편적 행사나 발견에는 특히나 그랬다. 귀에 이식한 칩은 보청기나 인공 와우처럼 그들이 장애를 지녔음을 드러내지 않게 해줬다. 그 칩은 비장애인들이 듣는 것과 거의 비슷한 볼륨으로 인식되도록 뇌에 파동을 일으켰다. 청력을 올려줬다기보다 인간의 음성을 뇌파로 바꿔주는 기능을 했다. 청력이 약한 장애인도 있지만 아예 없는 장애인에게 ‘올린다’는 표현 자체가 말이 안 되기도 했다. 개발에 10년, 보편화될 만큼 가격이 저렴해질 때까진 10년이 더 걸렸다. 그렇게 장애인은 비장애인 사회에 섞였다. 장애는 계속해서 존재해왔지만 사회와 기술은 마치 그 장애가 없는 것처럼 가려줬다. 화성인 사이보그 프로젝트에서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은 것도 이와 같은 흐름 속에 있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외면이었다.
지구에서 엄마의 귀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인공 칩이 화성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화성에는 청각 장애인이 살아갈 기술이나 제도나 시설 등등이 없다. 다른 장애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부상 휠체어가 지구에선 유효했지만 화성에선 쓰일 수 없었다. 발달 장애는 혹시나 모를 위험 상황을 야기할지도 모른다고 아직은 갈 수 없다고 결론 내려졌다. 화성엔 장애인이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발이 '멀쩡'해야 디딜 수 있었다.
듣지 말고 나랑 화성 같이 가자고, 내가 엄마의 귀 역할을 하겠다는 말에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가지 말라고, 그냥 지구에서 같이 살자고 했다면 나는 못 이기는 척 지구에 남았을 텐데. 새로움에 대한 열망, 마흔에도 할 수 있는 도전을 위해 화성에 간다고 했을 때 엄마는 이런 나의 핑계나 변명을 존중해주느라 바빴다. 부모가 부담도 줄 수 있는 건데, 이를 부모가 아닌 장애인이 주는 부담으로 간주하며 드러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나에겐 더 조심해야 할 부담으로 다가왔다. 기술은 장애인에게 불편함을 줄여줬지만 피해의식은 방치했다. 애초에 피해의식을 줄이는 기술 같은 건 없었다. 적어도 인공 칩 특유의 자연스러운 척하는 말투로 말하는 우리 엄마에겐 그러했다. 내가 청력 검사에서 평균을 살짝 밑도는 결과를 받았을 때도 본인 탓을 했다. 지긋지긋했다. 그럴수록 난 가족을, 아니 이 지구를 떠나고 싶었다.
우주 휴게소에서의 한 시간이 시작했다. ‘마지막 선택’의 시간이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10년 동안 화성에 살아야 했다. 여행 목적으로 가려는 사람을 막고 정착민을 늘리기 위한 나름의 합리적 방침이었다. 나는 화성에 갈 것이다. 10년 만이라도 나 홀로, 나로서, 다 잊고 살고 싶다. 그렇게 존재해보고 싶다. 부담이나 분노로부터 벗어나서 조금 편하게 살려고.
창 너머로 우주의 밝은 밤이 보인다. 남산 타워로 보던 야경, 한밤중 속초 바다에서 보이던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과 비슷했다. 수 십 년이 흘러도 그런 빛은 계속 있어왔다. 굳이 바꾸려 들지 않는, 기술 개발의 영역이 아닌 그런 삶의 풍경이었다. 칠흑의 우주 속 저 멀리 있는 별들엔 관심이 있지만 지구의 어떤 빛들엔 관심이 없었다. 감상에 젖는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창 밖 광경 탓인지 하나둘씩 돌아가겠다 손을 들었다. 모두가 손과 팔이 있었고, 모두가 손과 팔을 이용해 의사를 표현했다.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화성행 게이트 쪽으로 빠르게 향했다.
게이트 앞에 이어진 긴 줄에는 여러 감점선이 요동쳤다. 내 바로 앞에서 어떤 부부는 훌쩍이며 사진을 봤다. 벌써 보고 싶다고. 화성 간다고 우리 죽은 애기 어떻게 잊냐고. 잊자고 새출발 한 거 아니냐며. 통신기 너머로 수신된 소리를 못 들은 체했다. 뒤에서는 한껏 신나서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화성엔 정상인들만 모여사니까 피곤한 일 줄겠다고. 제대로 된 사람들끼리만 모여 있는 세상이 기대된다고.
나는 게이트를 빠져나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 소설이라 불리기엔 부끄러운 글이라 픽션이라고만 부릅니다. 언젠간 픽션이 아닌 소설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