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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벋으훈 Mar 06. 2022

MBTI론 : 명사가 아니라 동사

(영상으로 치자면 페이크다큐)


얼른 집 가서 낮잠 잘 생각에 신나게 걸어가던 중, 친구가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뭐하냐고 묻는 나. INTP가 아니라 ENTP ? 친한 친구들에겐 ENTP이고 보통은 INTP라면 그는 NTP-플루이드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가끔은 I와 E가 동시 발생하거나 딱 맞아 떨어지지도 않는 듯해서 NTP-그레이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나는 친한 친구들이랑 있어도 E보다는 I에 훨씬 밀접해서 NTP-I엄브렐라가 보다 정확해보인다. 사실 그는 NTP-퀘스처너리로 본인을 나타내고 싶어한다. 물론 질문 받지 않으면 말할 일도 없다.





계획을 세우는 것에 환장해있느나 딱히 엄격히 지키지는 않아서 P에 가깝다고 하지만 계획 안 세우는 건 불안하다. 여행은 예외적으로 계획을 안 세우지만 일상은 계획적이어야 한다. 검사 결과로 P를 지정 받았지만 문득 J가 맞지 않나란 생각을 한다. 어떤 이들은 검사 결과가 정확하다며 P에 불화를 느끼는 나를 우스워할 수도 있겠다. P에서 J로 바꾸려면 검사 결과가 명시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는 말이 지배적이다. 차라리 mbti를 묻지 않는 사회라면 그 불화를 느낄 일도 없을 거라 대꾸하려다 기운이 떨어져 대충 끄덕인다. 다른 알파벳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나서볼까?


MBTI로 소통할 때도 꽤나 풍부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하지만 16개는 부족하다. 명사는 늘 결핍의 상태에 있다. 언제나 희소해서 계속해 누적하는 가운데, 외부에 있는 것 혹은 존재를 안으로 당긴다. 명사는 효용적이되 한계를 지닌다. 한계와 함께 결실을 맺는다. 명사는 기능적 수단이다. 무작정 무용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명사가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도 오류의 연장이다.


근데 이제 MBTI별 행동양식이 자주 공유되다보니 학습을 거쳤다. '우울해서 머리 잘랐어'등의 기출 문제와 유사한 상황에서 '무슨 일 있어?'와 '오 어떻게 잘랐어'등의 반응을 일제히 보이게 됐다. 그리고 그 반응은 체화되어 큰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동시다발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잦아졌다. INTP로 보이고 싶을 때와 ENFJ로 패싱되고 싶을 때마다 어떻게 행동하면 될지 감이 왔다. 하지만 그 와중 S는 불가능하다.


아, MBTI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구나! 수행이구나. 나는 하나의 고정된 MBTI로 환원될 수 없구나.



존재는 대상과 대화하면서 끝없이 '세워진다'. 즉 끝없이 새로워진다. 오직 이 과정 속에서 주체가 인간 존재에 다가옥도 또 그렇게 주체가 존재와 더불어 세워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박치완.김윤채 <공간의 시학과 무욕의 상상력>, pp.251



* 참고


1. 김영진, 김상표. (2013). 화이트헤드디안 관점 -조직의 창조성과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 화이트헤드연구, 26(0), 1-22.     


"언어와 상징은 단순 정위된 사물을 가장 구체적인 표현으로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철학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영과 조직 문헌에서도 동일한 경향이 일어난다. 물론 일상에서 명사를 통해 대상을 구별하는 것은 충분한 효용성이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그 추상적 명사가 구체적인 경험과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고 부른다. 이는 어떤 목적을 위해 추상을 만들어서 사용하지만, 곧 그 목적을 잊어버리고 마치 그것이 실재를 반영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Burke에 의하면 [...] 실제적으로 이 개념들은 결코 안정적인 명사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경우에 개체와 조직을 단순 정위가 가능한 명사적 존재로 오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양자론에서 물질은 에너지이며, 에너지는 이미 상호 관계된 체계에 따라 구성된 것이기에, 물질은 영속적이지 않고 일시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명사로 부르는 개체들은 모두 사건의 관점에서, 변화의 전망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 다케다 히로나리, 김상운 역, <푸코의 미학:삶과 예술 사이에서>, 현실문화연구, 2018, pp.35-46


"주체는 스스로 말하고 주인을 같지 않은 언어, 이른바 바깥의 언어의 존재를 깨닫는다. 무엇인가를 말하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자신의 언어 속에서 늘 똑같이 위치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말하는 주체의 장소에는 어떤 공허가 가로지르며, 거기서는 다수의 말하는 주체가 서로 연결되고 분리되며, 서로 결합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 주체성의 붕괴, 언어 내부로의 산산이 흩어짐, 그리고 증식. 철학의 언어는 주체를 다시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계에 이르기까지 그 상실을 체험하기 위해 나아간다. 언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은 주체가 남긴 엄청난 공허 속, 즉 바깥에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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