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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Aug 27. 2019

글 써서 돈 벌겠다는 생각



전업작가가 되고 싶다. 글만 가지고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그러려면 취업준비를 하렴. 공무권도 괜찮겠다'다. 유명해진 사람이 자신의 어떤 성취나 일대기, 성공담을 나열할 것이 아니라면 글만 가지고 유명해지기란 쉽지 않다. 돈이 많은 사람, 유명한 사람은 이미 유명하기에 그의 책이 유명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반면 맨땅에 헤딩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발판을 다지기가 어려운 법이다. 세상에 참 많은 뛰어난 노래실력을 가진 사람이 있지만, 그 숫자에 비해 가수가 되는 사람은 적다. 이것은 노래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노래 부르는 것이 충분히 즐겁고, 그로 인한 자신 안에서의 성취감이나 외부에서의 반응이 적절히 만족스러워야 한다. 취미 정도로 무언가를 즐기는 사람은 그것을 본업으로 삼을 수 없다. 특히나 예술의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돈을 벌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좋아하는 것을 잘하는 사람 중에서도 특별히 잘해야 하고 물질적인 가치를 넘어서는 어떤 정신적인 만족감이 있어야 한다.


또 다른 케이스가 하나 있다면, 감정이 몸을 지배하는 사람이다. 예술적 행위를 통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간다. 넘쳐나는 생각의 꼬리들. 때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고독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많은 경우에 그 결론은 허무함과 직결되기 때문에 어쩌면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감정을 어떤 수단을 통해 표출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부분인데, 그것이 잘 표현될수록 감정은 더 격해지고 때때로 폭발해버린다. 거기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해소와는 차이가 있다. 어쩌면 이것은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것만큼이나 나를 살게 하는(어쩌면 죽게 하는) 중요한 행위다.


나는 나를 구속하는 무언가를 견디지 못한다. 어려서는 학교, 졸업을 하고서는 직장. 스스로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것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견디는 것’에 삶의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버린다. 하루 세끼 챙겨 먹기도 빠듯했던 6개월의 서울생활이 돈을 벌며 일을 하는 지금, 그렇게 그리울 줄이야. 분명 그때의 고충이 있다. 돈이 없어서 사람도 잘 만나지 못했다. 겨울이라 난방비가 걱정돼,  3천 원이 조금 넘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거의 온종일 카페에서 주린 배를 물로 채워가며 책을 읽었다. 그 마저도 아쉬울 때가 있는데, 그땐 교보문고를 이용했다. 점심이 되기 전에 도착해서 9시쯤 ‘퇴근’했다. 배고픔을 견딜 수 있는 한계가 9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낀 돈은 사람을 만날 때 사용됐다. 일주일을 아끼면 한번 외출이 가능했다. 그렇게 꼭 하루에 한 권, 많으면 두 권의 책을 소화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먹고, 적당히 취미생활도 즐기고, 친구와 한 번씩 만날 때도 거의 내가 돈을 낸다. 그렇게 하고도 조금이지만 저축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난 어느 때보다 답답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일을 하지만 무력감에 휩싸여 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낭비처럼 느껴진다. 틈이 나면 손에 잡히던 책과 글이 이제는 마음먹고 찾아야 하는 것이 됐고, 마음먹기는 쉽지 않다. 다시 가난하지만 꿈을 꾸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생활이 그리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난 충분히 오래 이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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