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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나무 Jun 05. 2020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작 30년 인생이 말하는 인생학

요즘 같이 자본주의,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엔 다른 사람, 집단으로부터 내가 규정돼 가는 것을 발견하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나를 찾고 개발하기 위한 수많은 책과 강연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타인이 규정하는 나’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는 거의 없다(협소한 독서량으로 형성된 주관적 경험에서 나오는 뇌피셜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1도 모르는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이런 속없는 말을 했다. “너 자신을 알라”. 오늘은 나 자신을 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특별히 시중에 널려 있는 ‘나 찾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속한 집단을 통해 나를 알고, 내 역할을 인정하며 이 성찰이 가져오는 만족과 평안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가? 조금 더 범위를 좁혀보자. 당신은 당신이 속한 나라에서 어떤 존재인가? 이것도 크다면 다시. 당신은 당신이 속한 지역에서 어떤 존재인가? 가정에서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범위를 높여가며, 또는 낮춰가며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생각해보자.


나는 우리 가족에게 자동차의 엔진과도 같은 존재다. 등본에 등록된 가족 구성원이 3명밖에 없으니 한 명 한 명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외부에서 재화를 벌기 위한 노동력을 최고로 많이 생산해 내는 위치에 있다.


나는 우리 마을에서 유명인사다. 사회적 위치가 상당히 높았던 아버지 덕분에 온 동네 사람들이 나를 안다.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우리 가게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지어졌고 장사를 했었다. 29년을 살았지만 아직까지도 나를 아가일 때 봤었다며 (내 입장에서는 초면인데) 반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어떤 존재인가? 나는 유권자다. 이 나라의 정치에 아주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온갖 선거에서 한 명 분의 투표를 하는 사람이다. (민원도 넣어 봤다.) 한 사람의 투표가 세상을 바꾼다지만 사실 정치하는 분들이 그분이 그분이라 누가 정치를 하든 우리나라가 참 별로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다만 덜 별로인 세상이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투표를 한다.

 

나의 존재가치는 어떤 시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가 얼마나 많이 영향을 받고 끼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의 경우에 내가 속한 많은 집단이 있지만, 내가 실직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집단은 아주 적은 단위였다. 나 자신에게나 가족에겐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면 난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 것이다. 이 말은 당신이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그에 준하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의 가치는 당신이 속한 지역사회와 관계 안에서 정의할 때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겪은 우울감은, 나의 가치를 더 높은 곳(또는 다른 곳)에서 찾다가 겪게 됐었다. 우울했던 때 나의 모습을 보면, 온통 생각이 작가로서의 삶에 가 있었다. 베스트셀러를 내고 강연도 다니는 그런 글로 성공한 삶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인생을 온전히 글을 쓰는 데에 투자하지 못하는 것이 싫었다. 그 당시 나는 거의 모든 시간을 가게를 보는 것에 투자하고 있었으니,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삶의 유일한 낙이 교회에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내 존재가치는 뚜렷했다. 해야 하는 역할이 있었고 그것을 해내는 것이 좋았다. 봉사지만, 신앙심으로 하는 것이라 자발적이었고 보람차며 재밌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말 알바가 그만두고 다시 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자 이런 유일한 위로는 더 큰 스트레스로 바뀌어 버렸다. 말하자면 괜찮은 날이 한 날도 없었다.


인생은 많은 경우에 내가 해야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기보다 하고 싶은 것에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이다. 물론 해야 하는 것이 하고 싶은 것이면 좋겠지만, 그런 인생이 어디 흔한가. 내 상황을 인정해야만 현재 나를 규정하고 있는 상황으로부터 나의 존재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내가 그리는 미래의 나를 바꾸라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나도 현재를 살아야 그려갈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나의 상황을 직시하는 것. 더 나아가 현재 나의 상황 속에서 내 역할을 알고 수행하는 것. 미래설계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가게 보는 것이 인생의 낭비로만 느껴졌었다. 하지만 가게 보는 일이 참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가게를 봄으로써 어머니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나아졌다. 또 한국의 거의 모든 젊은이들이 겪는 취업난을 겪지 않았고, 나를 뭐라 하는 사람 없이 온전히 책임감으로 사장 소리 들으면서 일을 했다. 무엇보다 돈을 많이 벌었다. 우리 가족의 생활이 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저 멀리 다른 사람을 위해 버려졌다고 생각했던 내 삶은, 생각보다 의미 있으며 나를 책임감 있고 능력 있는 멋진 사람이 되게 하기도 했다. 작가로서의 삶은 살지 못하고 있지만, 믿음직한 아들이며 사회적으로 썩 괜찮은 청년이 돼 있었다. 이것은 작가의 타이틀이 나에게 준 선물이 아니라 장사꾼인 직업이 나에게 준 훈장인 것이다.


사회적 역할을 인지하고 잘 수행함으로써 얻는 현실의 만족은 지금 사는 삶을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 긍정적이 마인드는 자존감을 높여줄뿐더러 미래의 어떤 일을 계획할 때 내가 마땅히 넘볼 수 있는, 가능성 있는 미래를 예측하게 해 준다. 다른 말로 무리한 계획이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도박을 건 미래를 피하게 해 준다. 지금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고 어렵고 힘들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아니 해야 하는 일을 생각해보자. 때로는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보다 ‘나는 별 것 아니다’라는 생각이 더 필요할 때도 있다.


뭐, 다르게 생각하면 현실에 안주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서른 즈음되면 현실에 만족하고 쉬어 갈 수 있는 것은 용기이고 지혜라고 생각한다. 마냥 쉬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조금 돌아가는 것이니, 이것이 진정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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