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그런 나를 돌아보는 글이다.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준다”는 행위는 언제나 부끄러움을 동반한다.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데서 오는 어색함, 누군가의 평가와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무엇보다 내 ‘출신’이 읽혀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나는 가난한 거리에서 태어났다. 인근의 부르주아들은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려 하지는 않았지만, 악의없이 시혜적이고 기만적인 태도가 만연해 있었다. 그것들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부르주아들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TV나 책에서 접할 때마다, 그들의 잘 짜인 문장과 논리를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세계에 편입되길 거부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나는 내 글을 ‘교양 있게’ 혹은 ‘지적으로’ 구성해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만 인정받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가 불편했다. 그래서 일부러 조금은 서툰 문장과 엉성한 표현들을 남겨두려 했다. 어설픈 부분이 있을 때, 그게 마치 나의 진짜 배경을 가리고 싶지 않은 저항의 표시인 듯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써야만 겨우 먹고살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나는 내 글을 어쩔 수 없이 타인에게 완벽한 모습으로 꾸며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심지어 내가 한때 애써 감추려 했던 글들을 매끈하게 다듬어 하나둘 옮겨 적고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문화 자본(cultural capita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난 환경에서 습득한 언어적·문화적 자원의 차이가 사회적 불평등을 만들어낸다는 이론이다. 나는 어려운 형편에서 태어나 자랐다. “서울말”과 “표준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정제된 문장을 구사하며, 어려운 철학 용어를 마치 일상 언어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서 은연중에 ‘시혜적 태도’를 느낀 기억이 있다.
그것은 곧잘 “너는 이런 걸 몰라도 괜찮아”라든지, “좀 배우면 잘할 거야” 같은 식의, 악의 없는 말들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이미 ‘계급 간 위계’가 내재해 있었다. 나는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누군가의 무의식적 시선 속에서 내가 ‘무지(無知)’하거나 ‘가난하다’고 규정되는 기분을 느꼈다. 글을 쓰면서, 내가 그들의 언어를 ‘잘’ 구사해야만 비로소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더 서툴게 쓰곤 했다. “일부러 일그러진 문장으로 나를 표현하겠다”는 어떤 어린 저항 의식이었다.
기만에 대한 두려움
영화 기생충을 떠올려보자.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 가족이 부잣집의 공간에 스며들 때, 그들은 끝없이 자신들의 “가난함”을 감춰야 했다. 마치 수준 높은 교양을 몸에 두른 듯 연기하면서도, 사실은 자기가 속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수치심을 함께 지닌다. 그들이 점점 더 깊이 가짜 신분으로 들어갈수록, 동시에 들킬까 봐 노심초사하는 불안감이 커지는 장면이 많다.
나도 내 글을 한껏 포장하고 ‘고급지게’ 써보려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쓰면 오히려 내가 나 자신을 기만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 “와, 글이 정말 논리적이고 깔끔하네요”라고 말하면, 그건 사실 누군가의 기준에서 나를 평가하는 것처럼 들려서 더 불편했다. 그래서 스스로 문장을 조금 흐트러뜨림으로써, “나는 내가 있는 곳에 여전히 서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싶었다.
들켜버릴 것 같은 나의 ‘출신’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서 신지의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 돼”라는 대사는, 내가 글을 쓰면서 느끼는 감정과 미묘하게 맞닿아 있다. 자꾸만 감정이 노출되어버리면 어떡하지, 나의 모자람이 전부 드러나버리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 말이다. 동시에, 글을 통해 제대로 된 인정도 받고 싶지만, 내 진짜 ‘배경’이나 ‘미숙함’을 들키는 순간 내 가치는 곤두박질칠까 봐 겁이 난다. 결국 이 이중적인 감정—인정받고 싶지만 들키기 두려운—이 나를 항상 글쓰기 앞에서 주저하게 만들곤 했다.
인정에 대한 욕망 vs. 거부감
나는 길거리에서의 언어, 비표준어, 혹은 사투리나 은어 같은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어떤 지점에서는 또 그것이 내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세상은 “표준화된 언어”와 “논리적인 문장 구성”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작가성’을 인정해주는 듯하다. 이를테면, 공식적 장소에서는 ‘고급 어휘력’이 곧 교양의 척도가 된다.
하지만 그런 척도에 스스로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다 보면, 내가 나 자신에게조차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정말 이 문장을 이렇게 쓰고 싶었나?” 생각해볼수록, 결국 내가 원하는 글쓰기의 지향점은 ‘정제된 문장’이라기보다 ‘솔직함’이라는 걸 깨닫는다.
글쓰기로 살아가기, 내 정체성을 드러내기
결국 글쓰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졌을 때, 나는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 글을 통해 내가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둔 이야기까지 보여줘야 할 필요를 느낀다. ‘번듯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 어차피 드러낼 거라면 내가 참아왔던 혼란과 두려움을 오히려 글 속에 적극적으로 녹여내고 싶기 때문이다.
다시 쓴다는 것: ‘창조적 전유(appropriation)’를 향해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예술 창작은 기존의 전통이나 언어를 ‘전유(appropriation)’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텍스트든, 작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끌어와 새롭게 변형하고 재맥락화하면서 작품을 만든다. 나는 ‘부르주아의 언어’에 대한 거부감 속에서도, 내 글쓰기의 기반이 되는 한국어와 사회적 문법을 온전히 부정할 수 없다. 그 언어가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속해 있던 세계의 언어이자, 동시에 내가 저항하고 싶은 구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언어를 주체적으로 ‘전유’하고 ‘개조’하는 것이다. 일부러 매끈하지 않은 문장과 내가 살아온 흔적을 드러내는 표현을 삽입하는 일은, 어쩌면 그 전유의 일부일 수 있다.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세계의 언어를, 내 방식으로 바꾸어 쓰겠다”는 선언이랄까.
나는 여전히 글쓰기가 부끄럽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에는 여럿이 섞여 있다. 가난했던 과거와, 그 사실을 감추려는 현재의 내가 섞인 부끄러움. 멋진 문장을 쓰고 싶지만 그럴수록 진짜 나를 숨기는 것 같아 느껴지는 부끄러움. 거기에 더해, 글을 보여주어야만 살아갈 수 있게 된 상황에 대한 스스로의 연민까지.
그렇다면 이 복합적 부끄러움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나는 이제 그것을 글의 ‘동력’으로 삼으려 한다. 서투르고 모자란 것들, 일부러 삐뚤게 남겨둔 구절들 속에서, 내가 지키려 했던 진솔함과 저항의 흔적을 되찾고 싶다. 결국, 글쓰기는 ‘가난한 거리’를 떠난 뒤에도 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무기가 되었다. 부끄러움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 부끄러움을 외면하지 않고 더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글을 쓰고, 또 계속해서 보여주고, 그러면서 내 정체성을 재구성해가는 과정의 핵심일 것이다.
“비뚤어진 문장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통해 나는 계속 쓴다.”
나는 그렇게, 이중적인 감정을 지닌 채 오늘도 문장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부끄러운 글을 쓰면서도, 그 부끄러움이 언젠가 나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줄 거라는 믿음을 조금씩 키워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