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폰 트리에의 실존주의
*해당 글은 아주 오래전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들을 보고 개인적으로 썼던 글을 재구성+보완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글이었기에, 인용구 중 출처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습니다
덴마크의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도발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작품들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들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실존적인 주제들을 탐구한다. 실제로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들이 존재론적 불안, 사회적 문제, 심리적 트라우마 등 인간 존재를 둘러싼 본질적인 이슈들을 과감하게 다룬다고 평가한다. 삶과 죽음, 성(性)과 파국 등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 주제들이 폰 트리에의 영화 전반에 흐르는 주요 테마로 지적되기도 한다. 실존주의는 키르케고르, 사르트르, 카뮈 등의 철학자들이 발전시킨 사조로, 불안, 자유, 책임과 같은 개념, 그리고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윤리적 딜레마에 직면한 개인의 선택을 중시한다. 폰 트리에는 바로 이러한 실존주의적 질문들 –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부조리한 세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 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집요하게 던지고 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초기부터 최근작까지 조망해 보면, 각 시대의 작품들마다 다양한 이야기와 형식 속에서도 일관되게 인간 존재의 불안과 갈등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에서는 그의 주요 작품군을 시대별로 살펴보며,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 개념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 본다.
폰 트리에의 초기작으로 분류되는 “유로파 삼부작” – 〈범죄의 요소〉(1984), 〈에피데믹〉(1987), 〈유로파〉(1991) – 에서는 이미 이상과 현실의 충돌이라는 실존적 주제가 두드러진다. 감독 스스로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와 실제의 나 사이의 간극은 내게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밝힌 바 있는데, 이는 곧 인간이 이상적으로 되고자 하는 자아와 실제 처한 현실의 자아 사이에서 느끼는 내적 분열을 뜻한다. 이러한 분열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본질에 선행하는 존재”의 불안과도 통한다. 예를 들어, 〈유로파〉는 2차 대전 직후 독일을 배경으로 이상주의자인 한 미국인 청년이 현실의 복잡한 도덕적 타협 속에서 이상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 영화에서 독일과 미국이라는 두 국가는 각각 관념적 이상과 현실적 실용주의를 상징하며, 주인공은 그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는 이상(꿈꾸는 자기)과 현실(일상적 자기) 사이의 끊임없는 내적 싸움이다. 결국 영화의 주인공은 스스로 믿던 이상(도덕적 선의)과 외부 현실(타협과 죄악) 간의 화해에 실패하고 파국에 치닫는데, 이러한 비극적 결말은 부조리한 세계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개인의 숙명적 좌절을 상징한다. 초기 작품들에서부터 폰 트리에는 세계의 혼돈과 개인의 이상이 부딪힐 때 발생하는 실존적 딜레마를 포착했고, 이는 이후 작품 세계의 기반이 된다.
1990년대 중후반의 폰 트리에 작품들은 흔히 “골든 하트 삼부작”으로 묶이며,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6), 〈백치들〉(1998), 2000년에 개봉한 〈어둠 속의 댄서〉로 삼부작이 완성된다. 이들 영화에서는 순수하고 선의로 가득 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잔인한 운명과 윤리적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폰 트리에는 이들을 통해 “착한 마음”이 냉혹한 현실에서 어떻게 시험받는지를 그려내며, 궁극적으로 신념과 희생의 의미를 묻는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는 신앙심 깊고 순진한 여자 베스가 등장한다. 베스는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남편 얀을 구하기 위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자기희생을 선택한다. 남편의 부탁과 자신의 신앙적 직관에 따라, 그녀는 다른 남자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고 그 경험을 남편에게 이야기함으로써 남편을 생존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베스의 이러한 선택은 주류 윤리관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윤리적 딜레마이다. 한편으로 그녀의 행동은 간통과 자기 파괴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극한 사랑과 믿음의 표현이다. 이는 마치 키르케고르가 《공포와 전율》에서 묘사한 “신앙의 기사”를 떠올리게 한다. 키르케고르는 성서 속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들 이삭을 바치려 한 행위를 통해, 윤리적으로 옳지 않아 보이는 일을 오직 신앙으로 수행하는 자를 “신앙의 기사”라고 불렀다. 베스 역시 세속적 도덕을 초월한 신념의 도약을 보여주며, “신앙의 기사”가 된다. 결국 베스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남편을 구하지만, 그 대가로 목숨을 잃는다. 그녀가 죽은 뒤 울려 퍼지는 천상의 교회 종소리는(영화 마지막 장면)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며, 베스의 희생이 과연 헛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기적을 불러온 성스러운 사랑이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폰 트리에는 이 극단적인 이야기를 통해 “냉혹하고 무관심한 우주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관객에게 묻는다. 이는 곧, 선의를 가진 개인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겪는 윤리적 갈등을 정면으로 보여주며 우리의 도덕관을 시험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삼부작의 두 번째 작품 〈백치들〉 역시 독특한 방식으로 진정성과 사회적 위선을 다룬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멀쩡한 지능을 가졌지만, 일부러 지적장애인 행세를 하며 사회 규범에 일종의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이를 “백치행위”라 부르며, 지적장애를 가장함으로써 오히려 사회가 억압하는 내면의 순수한 자아(‘내면의 바보’)를 해방시키고자 한다. 부르주아적 예의범절과 생산성의 강박에 찬 현실에 맞서, “바보짓”을 일종의 카타르시스적 행위 예술로 삼는 것이다. 이는 사르트르가 말한 “악덕”이 아닌 “앙가주망”(참여)으로서의 자유 또는 정신적 탈주로 볼 수도 있다. 즉, 사회적 가면을 벗고 진짜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 시도라는 것이다. 영화 내에서 이러한 실험의 진정한 의미는 카렌이라는 인물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카렌은 우연히 이 공동체에 합류한 순수하고 소심한 여성인데,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자기 가족 앞에서 실제로 정신장애인인 척하는 극한의 ‘연기’를 실행한다. 부유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가족 앞에서 바보 행세를 함으로써, 카렌은 그간 다른 구성원들이 놀이처럼 해왔던 행동을 자기 인생의 현실에서 실천해 버린 것이다. 이 충격적인 자기 폭로의 행위로 인해 카렌은 현실에서 큰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이 암시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는 끝난다. 이 결말은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조차 엄두 내지 못했던 “진짜로 자기 자신이 되기”를 카렌만이 해냈음을 보여준다. 한 필자는 이를 두고 “카렌만이 의미 있는 맥락에서 백치행위할 용기가 있었던 진정 담대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결국 〈백치들〉은 사회가 정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한 도전이자, 개인이 어디까지 자기 자유를 실행할 수 있는지 묻는 실존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나쁜 믿음(자기기만)”을 벗어나기 위한 고통스러운 탈피를 그린 이 영화는, 개인의 자유와 진정성이 얼마나 취약하고 얻기 어려운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어둠 속의 댄서〉는 앞선 작품들과 맥락을 같이하면서도 뮤지컬 형식을 빌려 비극적 휴머니즘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시각장애를 가진 이주노동자 셀마는 아들의 시력을 구하기 위해 극단적인 희생을 감내하는 순수한 영혼이다. 그녀는 공장에서 힘겹게 일하면서도 마음속에 울려 퍼지는 음악으로 삶의 고난을 견딘다. 그러나 그런 선의와 순수함조차 가혹한 현실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셀마는 돈을 훔친 이웃을 우발적으로 살해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는데, 사실 그 돈은 아들의 눈 수술비로 모은 돈이었다. 정작 셀마는 재판에서 자신의 사연을 끝까지 말하지 않고 형벌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아들을 구하기 위한 자기희생적 선택이었다. 결국 그녀는 교수대에 오르기 직전 마지막 노래를 부르다가 생을 마감한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셀마가 보여주는 모습은 “부조리한 세계에서도 인간은 어떻게 선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책임(아들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지키며 자유의지를 행사한다. 이 점에서 셀마는 카뮈가 말한 부조리한 영웅의 면모를 띤다. 알베르 카뮈는 “설령 우주가 부조리하더라도, 거기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며 반항하는 인간이 바로 부조리의 영웅”이라고 보았다. 셀마는 억울한 희생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타인을 원망하거나 삶을 부정하지 않고 (음악이라는 형태로나마)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부르는 노래 가사는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삶”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이는 비극적 이게도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완결 짓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폰 트리에는 이 작품을 통해 지극히 선한 의도를 가졌을지라도 현실의 논리에서는 죄인이 되어버리는 잔혹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유와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관객에게 깊은 실존적 슬픔과 물음을 안긴다.
“골든 하트” 삼부작의 세 영화는 각기 다르면서도 모두 순수한 개인 vs. 냉혹한 세계라는 구도를 취한다. 착하고 헌신적인 주인공들은 현실 속 타인들과 사회 제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상처 입거나 스스로를 바치게 된다. 폰 트리에는 이러한 극단적 이야기들을 통해 윤리적 순수함의 가치와 한계를 탐색한다. 즉, 선의만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가?, 절대적인 사랑이나 희생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들이다. 이는 실존주의의 핵심 물음 중 하나인 “인간은 스스로의 도덕적 가치를 어떻게 정립하는가”와 맞닿아 있다. 폰 트리에의 대답이 무엇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는 이 착한 인물들을 순교자처럼 그려냄으로써, 관객이 그들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연민을 통해 오히려 우리 사회의 냉혹함을 돌아보게 한다. 로저 이버트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두고 “이 영화는 관객에게 우주가 냉혹하고 무관심한 가운데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판단하도록 강요한다”라고 평했다. 마찬가지로, 이 삼부작은 관객이 쉽사리 결론 내릴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를 던져주며 실존적 고민을 체험케 하는 것이다.
한편, 폰 트리에는 이 시기 영화들의 형식 면에서도 사실성과 몰입감을 높이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1995년 동료들과 함께 “도그마 95” 선언을 주도하며 과도한 영화적 기교를 배제하고 날것의 현실을 포착하고자 했다.〈브레이킹 더 웨이브〉는 도그마 선언 이전이지만 손떨림 카메라와 자연조명을 활용하여 다큐멘터리 같은 현장감을 주었고, 〈백치들〉은 아예 도그마 규약을 따른 거친 촬영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실험들은 영화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진정성(Authenticity)을 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실존주의 예술이 지향하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 경험을 드러내려는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2000년대에 들어선 폰 트리에는 새로운 방식으로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 “기회의 땅(미국) 삼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인 〈도그빌〉(2003)은 무대처럼 꾸민 미니멀한 공간에서 인간 군상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실험극이다. 미국의 작은 산골 마을 도그빌에 어느 날 갑자기 도망자 여성 그레이스가 숨어들고,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녀를 숨겨주며 환대하지만 점차 노골적으로 착취하고 학대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무대에는 집과 거리의 경계선만 그려져 있고 벽이 없는 독특한 세트가 등장하는데, 이는 모든 행동이 낱낱이 드러나는 투명한 사회를 상징한다. 관객은 마치 “전지적 시점의 관찰자”가 되어, 마을 주민들이 겉으로는 선량해 보이지만 서서히 잔혹함을 드러내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이러한 설정은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Huis Clos)을 떠올리게 한다. 사르트르는 그 작품에서 “타인은 나에게 지옥”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는데, 〈도그빌〉에서 그레이스가 겪는 지옥 역시 다름 아닌 타인들, 즉 마을 공동체 사람들로부터 온다. 이 마을에서 그레이스는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성폭력까지 당하지만, 외부로 도망칠 길이 차단된 채 끔찍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가는 무력한 상태에 빠진다.〈도그빌〉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 공동체의 본성에 대한 어두운 통찰이다. 극 중 도그빌 주민들은 처음엔 친절했으나, 곧 자기들이 제공하는 보호에 대한 대가로 점점 가혹한 요구를 한다. 결국 그레이스가 빚진 처지라는 구실로 그녀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고 노예화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폰 트리에는 한 공동체 내부에서 도덕과 양심이 어떻게 붕괴되는지 천천히 해부한다. 흥미로운 점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서서히 악에 가담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대놓고 악당이라기보다, 보통 사람들 하나하나가 조금씩 선을 넘으면서 전체적으로는 끔찍한 악행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악의 평범성에 대한 통찰이자, 집단 속 개인의 책임 문제를 부각한다. 그레이스에 대한 착취와 폭력을 알면서도 눈감은 이웃들, 혹은 적극 동참한 이웃들 – 그들은 각자 작은 이익과 두려움 때문에 악에 가담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두가 공범이 된다. 영화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악행들에 대해 공동체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책임을 지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사실 이 물음은 사르트르식 실존주의 윤리의 핵심과도 닿아 있다. 사르트르는 “모든 인간은 자신이 행하는 일뿐만 아니라 행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라고 보았다. 즉 방관도 하나의 선택이며, 그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그빌〉에서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그레이스를 해쳤든, 소극적으로 묵인했든 결국 집합적 죄악을 짓는다. 관객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분노와 혐오를 느끼게 되고, 자연히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땠을까? 과연 나는 선할 수 있을까?” 자문하게 된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폰 트리에는 그레이스에게 반전의 선택을 부여한다. 마을 사람들의 배신으로 결국 갱단에 붙잡힌 그레이스는 뜻밖에도 갱단 보스인 아버지와 재회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휘두르는 압도적 폭력을 빌려, 자신을 학대한 도그빌 주민들을 처단할 권능을 얻게 된다. 이제 그레이스는 궁극의 윤리적 딜레마에 직면한다. 바로, 자신이 당한 대로 복수할 것인가, 아니면 용서할 것인가이다. 이 순간 영화는 잔혹 동화 같던 분위기에서 철학적 우화의 색채를 띠게 된다. 그레이스의 독백 장면에서 그녀는 깊은 고뇌 끝에 이러한 취지의 말을 한다: “만약 이 사람들을 용서한다면, 그건 그들이 한 행동이 사실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뜻이 되겠지... 그럼 이 사람들이 다른 곳에 가서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 거야.” 결국 그녀는 용서 대신 심판을 선택한다. 그녀의 결정에 따라 도그빌 주민들은 모두 처형되고 마을은 불타 없어진다. 이 충격적인 결말은 관객들에게 큰 카타르시스를 주면서도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과연 그레이스의 선택은 정당한가? 그녀는 피해자로서 가해자들을 응징했지만, 동시에 자신도 폭력의 가해자가 되었다. 이처럼 〈도그빌〉은 정의의 실현과 폭력의 연쇄라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폰 트리에는 끝내 명확한 도덕적 입장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관한 사르트르적 통찰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의 형벌에 처해져 있다”라고 말했다 – 우리는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그에 따르는 도덕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레이스는 용서를 선택할 수도, 복수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어떤 선택을 해도 그녀는 괴로웠을 것이다. 그녀는 복수를 택했지만, 그 대가로 자기 영혼에 커다란 짐을 지게 된다. 관객은 그녀의 결정을 완전히 옳다 또는 그르다 평가하기 어려우며, 그저 그 상황의 비극성과 도덕의 딜레마에 압도당할 뿐이다. 〈도그빌〉은 이처럼 인간의 자유 의지로 인한 도덕적 딜레마를 극한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우리가 당연시해 온 도덕법칙을 흔들어 놓는다. 동시에, 사회의 구조적 악 속에서 개인의 책임이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폰 트리에 자신도 이 영화에 대해 “우리가 속한 도시나 국가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나쁜 일들에 대해, 우리 모두 어느 정도 공모하고 있는 것 아닐까?”라는 문제의식을 담았다고 시사했다. 그렇기에 〈도그빌〉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한 실존주의적 성찰로 읽힌다.
〈도그빌〉의 후속작인 〈만덜레이〉(2005) 역시 유사한 구조로 전개되지만, 주제의 결은 조금 다르다. 이번에는 1930년대 미국 남부의 한 농장을 배경으로, 노예제가 폐지되었음에도 여전히 노예처럼 살아가는 흑인들과 이상주의적 백인 여성(〈도그빌〉의 그레이스와 동일 인물)이 등장한다. 그레이스는 이 농장에 남아 해방자를 자처하며 노예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새로운 규칙을 적용한다. 하지만 선의로 시작한 개혁은 점차 왜곡되고, 예기치 못한 비극을 낳는다. 〈만덜레이〉는 “선의로 타인의 운명을 개입하는 행위의 위험성”을 다룬다. 자유를 선물로 줄 수 있다고 믿었던 그레이스의 오만, 그리고 자유에 익숙지 않은 피억압자들의 혼란이 빚어내는 비극은 복잡한 윤리적 질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식민주의나 이념적 이상의 실패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더 나아가, 실존주의적으로 보면 〈만덜레이〉는 “타인의 자유를 위해 내가 어디까지 개입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어려운 물음을 던진다. 이는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 등에서 논의한 타자와의 관계, 집단 속 자유의 역설과 통한다. 결과적으로 그레이스는 또 한 번 자신의 이상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좌절하지만, 폰 트리에는 이 과정을 통해 자유와 책임의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요컨대, 〈도그빌〉과 〈만덜레이〉로 대표되는 미국 삼부작의 작품들은 개인 대 집단의 구도 속에서 도덕, 권력, 자유의 문제를 탐구한다. 폰 트리에는 극단적인 설정(벽이 없는 마을, 폐쇄된 농장사회)을 통해 인간 사회를 하나의 실험실처럼 꾸며놓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권선징악의 전복을 낱낱이 보여준다. 이로써 “타인은 지옥”이라는 경구가 가진 진실 – 인간이 모이면 벌어지는 지옥 같은 면면 – 을 폭로하면서도, 그 지옥을 만든 책임이 결국 인간에게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의 시선은 냉혹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철학적이다.
2000년대 후반, 폰 트리에는 자신의 내면을 더욱 직설적으로 투영한 어둡고도 도발적인 작품들을 내놓는다. 이른바 “우울 삼부작”으로 불리는 〈안티크라이스트〉(2009), 〈멜랑콜리아〉(2011), 〈님포매니악〉(2013)이 그것이다. 이 삼부작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우울, 멜랑콜리(우울증), 성적 강박 등 인간의 내면 깊숙한 불안과 절망의 정서를 전면에 내세운다. 폰 트리에는 실제로 심각한 우울증을 겪은 후 이 작품들을 만들었으며, 자신의 심리 상태를 영화적으로 승화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이전 작품들보다도 한층 실존주의 철학의 정서적 측면 – 즉 불안과 절망 – 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이 작품들을 통해 감독은 삶의 부조리와 인간 내면의 어둠을 응시하며, 한계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탐색한다.
〈안티크라이스트〉는 삼부작의 서막을 여는 작품으로, 개봉 당시 극단적 폭력성과 파격적 성묘사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서두에 어린 아들의 죽음을 겪은 부부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곧 남편과 아내가 숲 속 오두막으로 들어가 원초적 광기와 공포를 체험하는 악몽 같은 서사로 전개된다. 폰 트리에는 이 영화에서 인간 문명 이전의 “자연”을 거대한 악몽으로 그려낸다. 숲은 혼돈과 악의 공간이며, 아내(샬롯 갱스부르 분)는 그곳에서 점차 이성을 잃고 폭력적 광기에 사로잡힌다. 남편(윌렘 데포 분)은 아내를 치료하려다 오히려 그녀의 광기에 휘말려 끔찍한 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이 불쾌하고도 난해한 전개 속에서 감독이 던지는 것은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이다. 영화 속 아내는 연구 중이던 마녀사냥 역사서를 통해 “자연은 사탄의 교회”라는 문장을 입에 올리는데, 이는 선한 신이 지배하는 질서 대신, 악한 자연의 혼돈이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는 식의 암시로 읽힌다. 실제로 작품 전반에 걸쳐 자연은 아름다운 동시에 잔혹한 것으로 묘사된다. 아들을 잃은 부모의 비극적 슬픔이 광기 어린 폭력으로 변모해 가는 이 서사는, 우리가 억눌러온 무의식의 어둠과 마주할 때 인간 이성이 얼마나 무력해지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공포”와 “불안”은 인간 존재의 근본 정서로 논의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세계-내-존재의 근원적 불안이라 했고, 키르케고르는 죄의 가능성을 직면할 때 느끼는 어지러움이라 했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폰 트리에는 이러한 원초적 불안을 거의 공포 영화에 가까운 방식으로 형상화했다. 특히 영화 중간에 여우가 인간의 언어로 “혼돈이 지배한다(Chaos reigns)”라고 중얼거리는 악몽 같은 장면은, 질서 부재의 세계에서 인간이 느끼는 심연의 공포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는 명쾌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으며, 관객들도 서사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강렬한 심리적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안티크라이스트〉는 실존적 공포를 논리적 담론이 아닌 체험으로 전달함으로써, 삶의 부조리와 내면의 악마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폰 트리에는 이 영화를 자신의 가장 개인적 작품이라 불렀는데, 이는 그만큼 그가 겪은 내면의 지옥을 가감 없이 쏟아냈음을 의미할 것이다.
삼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멜랑콜리아〉는 파국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서정적이고 사색적인 분위기를 띤다. 이 영화는 거대한 행성 ‘멜랑콜리아’가 지구와 충돌한다는 세계의 종말을 소재로, 그 종말을 맞이하는 두 자매의 대비된 태도를 그린다. 우울증을 앓는 동생 저스틴 (커스틴 던스트 분)은 행복해야 할 날인 결혼식 날부터 이미 심각한 우울 증세로 정상적인 생활이 힘든 상태다. 반면 현실적이고 책임감 강한 언니 클레어 (샬롯 갱스부르 분)는 동생을 돌보며 가정을 지키려 애쓴다. 하지만 종말의 운석이 다가온다는 소식 앞에서, 두 자매의 모습은 역전된다. 절망에 젖어있던 저스틴은 오히려 차분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르고, 평온하던 클레어는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무너져버린다.
폰 트리에는 〈멜랑콜리아〉를 통해 실존주의의 핵심 물음 중 하나인 “삶의 부조리와 죽음”을 정면으로 다룬다. 이 작품은 한편으로 허무주의의 색채를 띤다. 영화 도입부부터 거대한 청색 행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모든 생명을 쓸어버리는 장엄한 이미지를 보여주며 시작하는데, 이는 세상의 파멸이 이미 예정된 사실임을 관객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 속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와 드라마는 근본적으로 덧없어 보인다. 그러나 폰 트리에는 단순히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부조리한 운명 앞에서 인간이 보이는 서로 다른 태도를 보여주면서, 그 속에서 엿보이는 삶의 진실을 포착한다.
영화 후반부, 지구 충돌이 확실시되자 클레어는 극도의 공포에 질려 발버둥 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반면 저스틴은 “지구밖에 없는 우리 인간은 아무 의미 없다”는 식의 말을 하며 냉소적으로 체념하지만, 정작 마지막 순간에는 조용히 어린 조카의 손을 잡고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인다. 저스틴은 오두막 마당에 “마법의 동굴”을 세우자며, 동그란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작은 막대집 안에서 언니와 조카를 달래준다. 셋은 두 손을 맞잡고 앉아 거대한 행성이 덮쳐오는 광경을 눈을 뜬 채 맞는다. 이 장면에서 저스틴의 표정은 오히려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이는 초기의 절망에 찬 모습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데,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뜻할까? 한 해석에 따르면 저스틴은 죽음의 불가피성을 완전히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평온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더 이상 두려움이나 불안에 휩싸이지 않고 오히려 마지막 순간 남은 가족과 연대하며 인간적인 온기를 나눈다. 이는 실존주의 문학에서 부조리한 영웅의 태도를 닮았다.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는 “설령 우주가 우리를 전혀 돌보지 않고 결국 죽음만이 확실한 조건일지라도, 인간은 반항하며 자기만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저스틴은 바로 그런 반항과 수용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세상이 무의미하다고 냉소하던 그녀가, 막상 최후의 순간에는 조카를 감싸 안으며 작은 의미의 순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저스틴과 클레어 자매의 상반된 반응은 실존주의의 두 가지 모습처럼 보인다. 클레어는 평소 현실에 충실한 윤리적 인간이었다. 하지만 막상 절대절망의 상황(세상의 종말)에 직면하자 그녀는 이성적 태세가 무너지고 본능적 공포에 잠식된다. 이는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실존적 불안의 표본처럼 그려진다. 한편 저스틴은 심각한 우울증으로 인해 이미 기존 사회의 의미망에서 이탈해 있었던 인물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인지, 종말이라는 부조리에 직면했을 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의 초연함을 보인다. 어떤 평론은 “저스틴은 죽음을 충분히 애도할 시간을 가졌기에 마침내 평화를 얻고 차분히 최후를 맞는다”라고 평했다. 실제로 영화에서 저스틴은 결혼식 이후 급격히 무너져 거의 자포자기의 시간을 오래 보냈고, 오히려 클레어가 종말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을 벌어주기도 했다. 저스틴은 철저한 허무 속에서 모든 희망을 내려놓았기에, 도리어 마지막에는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멜랑콜리아〉는 우울증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우주적 규모의 상징으로 확장시킨 독특한 작품이다. 폰 트리에는 이 영화를 “나의 우울이 세상을 끝장낼 정도로 커져버린 느낌”에서 착안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기에 영화 속 멜랑콜리아 행성은 단순한 SF적 설정이 아니라 우울 그 자체의 메타포로 읽힌다. 저스틴이라는 우울증 환자는 자신만의 감정 세계에 갇혀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는데, 정작 세상 자체가 파멸에 이를 때 그녀는 오히려 평정심을 찾는 역설을 겪는다. 이는 “멜랑콜리한 사람은 지구의 종말조차 담담히 맞이한다”는 감독 자신의 역설적 유머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심각한 우울을 겪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통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스틴의 눈에는 원래부터 인생이 무의미했기 때문에, 종말이 와도 새삼 놀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폰 트리에는 이 냉소를 완전한 허무로 마무리하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마지막 장면에서 자매와 아이가 손을 맞잡는 모습은 묘한 감동과 함께 어떤 인간적인 연대의 중요성을 암시한다. 비록 아무것도 구원할 수 없지만, 함께한다는 사실 자체가 작은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절망 속에서도 인간답게 행동하는 선택의 자유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멜랑콜리아〉는 폰 트리에가 실존주의의 부조리 개념을 우아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거대한 행성과 지구의 충돌이라는 설정은 삶의 무상함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지만, 감독은 그 와중에도 인간 내면의 섬세한 정서와 선택을 놓치지 않는다. 니체는 비극을 직면함으로써 오히려 삶을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환희를 말했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은 일종의 “숭고한 비극미”를 느끼게 한다. 실존적 불안의 극치에서 태연한 수용으로 나아가는 저스틴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죽음과 무(無)에 대해 새로운 시선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우울 삼부작의 대미를 장식한 〈님포매니악〉은 4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 두 편으로 나뉘어 개봉한 대작이다. 제목이 의미하듯, 이는 한 여성의 성적 욕망과 중독의 일대기를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단순히 선정적인 영화가 아니라, 인간 욕망에 내재한 공허와 구원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담고 있다. 줄거리상 이 영화는 중년 여성 조(샬롯 갱스부르 분)가 어느 골목에서 폭행당해 쓰러져 있다가, 지적인 노인 셀리그먼(스텔란 스카스가르드 분)에게 발견되어 그의 집에서 치료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후 영화 전편에 걸쳐 조는 자신이 색정중독자가 된 경위와 삶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고, 셀리그먼은 그것을 경청하며 중간중간 문학, 종교, 음악, 수학 등 박학다식한 지식을 동원해 그녀의 이야기에 코멘트를 붙인다. 마치 한 편의 고해성사 혹은 심리 상담과도 같은 형식으로, 관객은 조의 내면세계와 삶을 1인칭 시점에서 따라가게 된다.
조가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는 쾌락의 추구와 죄의식의 반복으로 요약된다. 어린 시절부터 남들보다 강한 성충동을 느낀 조는 십 대에 무분별한 성경험을 시작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수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녀는 자신을 솔직히 “나쁜 인간”이라고 칭하며 죄의식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욕망을 멈출 수 없는 자신을 받아들이려 한다. 영화는 챕터 형식으로 구성되어 각 단계에서 조가 겪는 사랑, 욕망, 상실, 자기 학대, 시도된 구원 등을 묘사한다. 한 평론은 “이 영화는 사실 섹스나 중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심판(판단)과 도피(회피)에 관한 이야기”라고 짚었다. 실제로 영화 전반에 깔린 정서는 조가 끊임없이 타인으로부터 판단받고, 동시에 자신도 자기 자신을 판단하며, 그 고통에서 도망치려 한다는 것이다. 조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애정, 그리고 그의 죽음에서 비롯된 트라우마, 첫사랑과의 관계에서 느낀 흥분과 상실 등을 거치며 점점 더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이어간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서 조는 감각의 마비를 겪는데, 너무 많은 쾌락을 추구한 나머지 더 이상 성적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욕망의 허무를 드러내는 대목으로, 조는 쾌감을 찾기 위해 더 자극적인 행위로 자신을 몰아붙이지만 그럴수록 상처만 커진다. 결국 그녀는 “나는 정말 나쁜 인간이라서 어떤 도움도 받을 자격이 없다”며 자기혐오에 빠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조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써 일종의 자기 구원을 시도하고 있다. 셀리그먼이라는 청자는 조를 도덕적으로 정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의 이야기에 지적인 해석을 덧붙이며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예를 들어, 그는 조의 낚시 바늘 이야기에 아이작 월튼의 《조어대전》을 비유로 들거나, 조의 다인종 애인들을 바흐의 음악에 빗대는 식으로 그녀의 경험을 객관화해 준다. 심지어 셀리그먼은 자신이 무성애자임을 밝히며 조를 전혀 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기에, 조에게 처음으로 비판단적이고 안전한 공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청자-화자의 관계는 마치 실존주의 치료나 철학적 대화를 연상시킨다. 조는 자기 자신의 실존을 해명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이야기하고, 셀리그먼은 다양한 지식을 동원해 그것을 하나의 인간 보편의 이야기로서 성찰하려 한다.
그렇다고 영화가 조의 구원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폰 트리에는 마지막 순간에 신랄한 반전을 집어넣는다. 자신의 모든 치부를 드러내 보인 후, 조는 약간의 해방감을 얻은 듯 보인다. 하지만 셀리그먼이 그녀에게 성적 접촉을 시도하면서 상황은 뒤집힌다. 셀리그먼은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행위를 해본 적 없었지만, 네 이야기를 들으며 흥분을 느꼈다”며 다가선다. 조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그를 밀쳐내고, 테이블 서랍에 두었던 총을 들어 셀리그먼을 쏜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겼을 때 총알은 이미 없는 상태였고, 총성 대신 빈 소리만 울린다. 이에 조는 절규 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영화는 끝난다. 이 결말은 매우 냉소적이고 아이러니하다. 관객은 셀리그먼을 지적이고 온화한 구원자적 인물로 여겼겠지만, 결국 그는 조가 믿었던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 없는 욕망의 포식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조는 마지막 신뢰마저 배신당한 채, 다시금 홀로 어둠 속에 남게 된다.
이것은 폰 트리에가 전하고자 하는 냉혹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결국 이해받지 못한다.” 조는 자신의 모든 실존적 고통을 털어놓았지만, 돌아온 것은 이해가 아니라 또 하나의 착취 시도였다. 이러한 결말을 통해 폰 트리에는 인간 사이의 소통의 한계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해야 하는 실존적 고독을 암시한다. 이 영화 속 조의 여정은 죄와 벌, 자기 부정과 자기 긍정 사이를 왕복하는 실존적 탐구였다. 조는 스스로를 “나쁜 인간”이라 하면서도, 끝내 자기 목소리로 자신을 규정하고자 했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 등에서 여성의 성적 주체성과 사회의 시선을 분석했는데, 조의 이야기는 한 여성의 솔직한 성적 자기 서사로서 보부아르적 페미니즘과도 연결될 수 있다. 사회는 끊임없이 조를 낙인찍고 판단했지만, 조는 자신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 서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정의하려 했다. 이러한 점에서 〈님포매니악〉은 실존주의의 자기 정의, 자기 서사의 측면을 강하게 보여준다. 다만 폰 트리에는 끝끝내 현실의 냉혹함을 잊지 않고, 조의 시도가 완전한 해방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함으로써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이것이 어쩌면 그의 솔직한 관점일 것이다. 인간은 구원을 갈망하지만, 완전한 구원 따위는 없으며, 오직 끊임없는 자기 이해의 노력과 그에 따르는 고독만이 있을 뿐이라는.
정리하면, 우울 삼부작은 폰 트리에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가장 내면 지향적이고 실존주의적 색채가 짙은 작품들이다. 〈안티크라이스트〉는 원초적 공포와 악을, 〈멜랑콜리아〉는 허무 속에서도 맞는 죽음을, 〈님포매니악〉은 욕망과 자기규정의 문제를 다룬다. 이 세 작품 모두 전통적 서사 구조를 벗어나 파편화된 장면들과 상징, 솔직한 정서의 표출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관객에게 한 인간의 의식 흐름을 체험시키는 듯한 효과를 준다. 폰 트리에는 이를 통해 삶의 가장 어두운 면 – 절망, 불안, 죄책감, 허무 – 을 마주 보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어둠 속에서조차 인간이 어떠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 (광기에 잠식되거나, 체념 속의 평온을 찾거나, 자기 고백을 시도하거나 등) 보여줌으로써,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 실존의 진실을 탐구한다. 이 삼부작은 관객에게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실존주의 철학이 말하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를 예술로 풀어낸 강렬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폰 트리에는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 이 작품들을 통해, 결국 인간 존재란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투성이임을 토로한 것인지도 모른다.
폰 트리에는 2010년대 후반에 이르러 또 하나의 파격적인 작품 〈살인마 잭의 집〉(2018)을 선보였다. 이 영화는 “살인마의 시점에서 그려낸 연쇄살인 5막”이라고 요약될 수 있는 충격적 내용으로, 다시 한번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표면의 잔혹함 뒤에는 예술과 도덕, 창작자 자신의 성찰이 담겨 있어 흥미로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주인공 잭(맷 딜런 분)은 지능적이지만 병적으로 냉혹한 연쇄살인범으로, 자신의 살인을 하나의 예술 창작 행위로 여긴다. 그는 영화 내내 과거에 저지른 다섯 가지 “사건(살인)”을 회상 형식으로 이야기하며, 마치 예술 작품의 작업 과정을 설명하듯 자기 범죄를 미화하려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잭의 내레이션에 끼어들어 그와 대화하는 의문의 인물 버지가 있다는 점이다. 버지(브루노 간츠 분)는 마치 철학자나 성직자 같은 목소리로 잭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듣고 되묻는다. 관객은 후반부에 가서야 버지의 정체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안내자 베르길리우스(Virgil) 임을 알게 된다. 즉 버지는 사후 세계로 잭을 이끄는 영혼의 안내자였던 것이다. 영화는 결국 잭이 버지와 함께 지옥의 심연으로 내려가는 초현실적 장면으로 클라이맥스를 맺는다.
〈살인마 잭의 집〉은 여러모로 폰 트리에 자신의 메타포적인 분신으로 여겨진다. 잭이 저지르는 극단적 폭력과 자기 합리화는, 폰 트리에가 그간 만들어온 논쟁적인 영화들과 이에 대한 자기변명을 떠올리게 한다. 잭은 살인을 저지르면서 사진을 찍어 기록하고, 시신을 예술품처럼 배치하여 자신만의 “집”을 지으려 한다. 그는 “내가 지은 집은 곧 나 자신”이라고 말하며, 완전한 미적 성취를 꿈꾼다. 하지만 버지는 그런 잭에게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한다. “네 예술이 대체 인류에 무슨 가치가 있느냐”, “너의 행위는 그저 잔혹함일 뿐이다” 등, 마치 도덕의 목소리처럼 그를 질책한다. 이것은 폰 트리에가 자신의 예술을 둘러싼 비판들과 씨름하는 모습처럼 읽힌다. 실제로 폰 트리에는 그간 잔혹한 폭력, 여성에 대한 가혹한 묘사 등으로 비판받아왔고, 스스로 “예술가의 자유 vs. 윤리적 책임” 사이에서 고민을 토로한 바 있다. 잭과 버지의 대화는 이러한 예술 윤리에 대한 자기 성찰로 가득하다.
영화의 마지막 30분은 잭과 버지가 단테의 지옥 편을 연상시키는 지하 세계를 걷는 장면들로 채워진다. 버지는 잭을 “너 같은 영혼이 갈 곳”이라며 지옥의 가장 밑바닥으로 안내한다. 잭은 지옥의 절벽 아래, 멀리 보이는 타오르는 불길 건너편에 천국으로 통하는 다리가 있음을 발견하고는, 무모하게도 그곳에 가보겠다고 한다. 그는 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라 다리로 진입하려 시도하지만, 결국 발을 헛디뎌 무저갱 속으로 추락하고 만다. 이 결말은 상당히 상징적이다. 잭은 끝까지 교만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구원을 향해 달려들지만, 결국 영원한 파멸을 맞이한다. 마치 예술가로서 모든 한계를 넘어 절대적인 것을 창조해 보려다 스스로를 파괴한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폰 트리에는 이 처참한 최후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예술적 과오와 한계를 인정하고, 동시에 도덕적 심판을 자처한 것일 수 있다. 실제로 폰 트리에는 이 작품을 만들 당시 여러 논란에 휩싸여 (칸 영화제에서 부적절한 발언으로 “추방”을 당하는 등)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넣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부 평론가들은 〈살인마 잭의 집〉을 두고 “폰 트리에의 자기 참회록이자 자기 처벌”이라고도 해석한다. 한 매체는 이 영화를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행위”라고 평하며, 폰 트리에가 자신의 실수들과 자기혐오를 캐릭터 잭에 투영했다고 보았다.
또한 이 영화는 니체적인 주제도 떠올리게 한다. 잭은 스스로를 초인적 예술가로 여기며 일반적 선악을 초월하려 하지만, 결국 초인에 이르지 못한 채 추락한다. 이는 니체가 경고한 “네가 심연을 응시할 때 심연도 너를 응시한다”는 말이나, 오만한 인간의 몰락 모티프와 닿아 있다. 동시에 단테의 《신곡》을 모티브로 한 점에서, 죄와 벌, 구원의 종교적 서사 구조를 갖는다. 잭이 끝끝내 다다르지 못한 천국의 다리는, 어쩌면 폰 트리에 자신의 구원에 대한 열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폰 트리에는 그 구원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잭을 추락시키는 냉혹한 결말은, 감독이 도덕적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관객들에게 강렬한 교훈을 남긴다. 즉 “어떠한 예술도 면죄부가 될 순 없다”는 것이다. 예술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은 결국 폭력으로서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윤리적 귀결을 제시한 셈이다.
〈살인마 잭의 집〉을 끝으로, 폰 트리에는 자신의 오랜 테마들을 일종의 자기 반영적 메타 영화로 집약해 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극악한 사이코패스의 이야기지만, 내포적으로는 예술 창작의 본질과 예술가의 책임을 논한다. 동시에, 그의 이전 모든 작품에서 다루었던 고통, 폭력, 희생, 죄의식 등의 요소를 한데 모아 결산하는 느낌도 준다. 잭이라는 캐릭터는 일종의 실존적 인간의 실패한 초상이다. 그는 자유를 착각하여 방종했고, 책임을 외면했으며, 결국 자신의 지옥을 스스로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잭의 집은 그가 지은 죄와 악행이 쌓여 만들어진 그의 내면세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집은 마지막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잭이 시신으로 집을 쌓는 장면에서, 완성 직전 집이 무너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폰 트리에가 우리에게 전하는 엄중한 메시지일 것이다. “스스로 만든 잘못된 신념과 악행의 집은 결국 무너진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전적인 책임을 지게 마련이며, 그 대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필모그래피를 실존주의 철학의 관점에서 쭉 살펴보면, 그의 작품세계는 한 편의 거대한 실존적 탐구의 여정처럼 느껴진다. 초기작에서 제시된 이상과 현실의 모순, 90년대 삼부작의 윤리적 딜레마, 2000년대 작품들의 공동체와 폭력에 대한 성찰, 그리고 우울 삼부작을 거쳐 최신작에 이르기까지, 폰 트리에는 끊임없이 인간 존재의 본질적 질문들을 던져왔다. “왜 인간은 불안에 떠는가?”, “완전한 자유란 가능한가?”, “도덕은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고통과 악은 어디서 오는가?”, “예술은 구원인가 파멸인가?” 등 그의 영화가 제기하는 질문들은 곧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고민해 온 주제들과 겹쳐진다.
물론 폰 트리에는 철학 이론을 영화 속에 직접 나열하거나 친절한 해설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극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을 통해 관객이 느끼고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폰 트리에의 영화는 “발끝에 들어온 작은 돌멩이처럼 관객을 불편하게 하여 끝내 자극을 주는” 효과를 낸다. 이는 그가 의도적으로 관객의 감정과 도덕적 안락함을 뒤흔들어, 쉽게 잊히지 않는 실존적 불편함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충격요법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들은 한 걸음 떨어져 보면 매우 치밀한 주제 의식과 예술적 구성 아래 움직인다. 예컨대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 종교와 사랑, 〈도그빌〉에서 권력과 도덕,〈멜랑콜리아〉에서 허무와 구원, 〈님포매니악〉에서 욕망과 죄책 등, 상반되는 개념들을 충돌시켜 새로운 통찰을 끌어낸다. 이러한 충돌 속에서 폰 트리에는 결코 하나의 정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모순 자체를 직시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관객 각자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강요한다. 이는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개인의 주체적 선택과 닮아 있다.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나 도덕적 판단은 각자가 자기 책임 하에 내려야 할 것이며, 폰 트리에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바로 그 자유롭지만 무거운 선택의 책임을 체험시키는 것이다.
폰 트리에는 한 인터뷰에서 “내 모든 이야기들은 현실주의자가 삶과 충돌하는 이야기다. 나는 현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현실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은 그의 작품 세계를 꿰뚫는 통찰로 들린다. 그는 현실과 불화하는 인물들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를 폭로하고,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빛과 선의의 가능성도 조명한다. 예컨대 비록 비극적 결말이 많지만,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마지막 종소리, 〈어둠 속의 댄서〉의 음악, 〈멜랑콜리아〉의 손잡는 세 사람 등에서 엿보이듯, 완전한 절망 속에서도 작은 구원의 순간을 암시하곤 한다. 이것이 폰 트리에 작품의 아이러니이자 깊이이다. 지독한 절망을 묘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절망을 응시하는 자세 자체에 어떤 구원의 가능성을 담는다. 마치 캄캄한 무대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듯, 그는 최악의 상황 속 인간의 한 조각 진실이나 연민, 사랑을 포착해 낸다.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인간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말한다. 라스 폰 트리에의 캐릭터들은 바로 그 싸움을 벌인다. 어떤 이들은 실패하고 (그레이스는 복수자 되어 스스로도 지옥을 맛보고, 잭은 자신의 오만으로 추락하며), 어떤 이들은 숭고하게 빛나며 (베스와 셀마의 희생, 저스틴의 담담한 최후), 어떤 이들은 끝없이 방황한다 (조의 자기 고백과 좌절).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 역시 감정적으로 혹은 지적으로 큰 도전에 직면한다. 폰 트리에의 영화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 인간을 이해해 보라고, 안락한 믿음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고해 보라고 요구한다. 그는 관객에게 불안을 안겨주지만, 그 불안을 통해 자유와 책임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로울 것을 강요받았다”라고 했는데, 폰 트리에는 바로 그 자유의 무게를 영화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요컨대, 라스 폰 트리에가 일관되게 던지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존재는 근원적으로 불안하고 세계는 때때로 잔혹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도피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는 것,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인간의 존엄이며 의미이다.” 그의 영화들은 이 메시지를 직접 설파하기보다, 관객이 느끼고 깨닫게 함으로써 전달한다. 그렇기에 한 번 접한 폰 트리에의 영화는 쉽게 잊히지 않고 오랜 숙고의 주제가 된다. 실존주의 철학의 언어를 빌리자면, 폰 트리에는 우리에게 “너 자신과 삶을 속이지 말고 마주 보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불편한 진실을 꺼내 보이고, 우리 내면의 불안을 자극하여, 궁극적으로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 이것이 라스 폰 트리에 작품세계의 힘이자 철학적 깊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