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무대 위에 펼쳐진 실재계의 잔향
* 해당 글은 트레바리 모임 독후감으로 작성되었던 글입니다.
장용순의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을 펼쳐 들었을 때, 나는 마치 독특한 영화 한 편을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이 책 속에서 라캉의 세계가 펼쳐질 때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키워드로부터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채, 실재계와 상징계, 상상계가 교차하는 이상한 무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이끌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칸트의 철학에서 '완전하고 독립적인 실재'는 우리의 경험 속에 결코 들어오지 않는다. 칸트에게 실재(물자체)는 인간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오직 '있다고 상정할 뿐인 무언가'다. 영화로 치자면 필름 밖의 세계처럼, 우리는 결코 직접 만나지 못하되 그 존재를 어렴풋이 느낀다.
하지만 라캉의 실재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며, 동시에 결코 완벽히 붙잡히지 않는 어떤 것'에 가깝다. 우리가 너무나도 익숙해졌다고 믿는 언어와 상징체계(곧 라캉의 상징계)가 가려버린 그 어딘가, 혹은 그 뒤편에 자리 잡은 미지의 영역이다.
책을 읽으며 문득 '사랑'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사랑은 종종 우리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고, 때로는 환상이나 지나친 욕망일 뿐이라고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라캉의 말대로라면, 바로 그 '정확히 표현할 수 없고 또 억압되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어떤 것'이 사랑이자 동시에 실재가 된다. 마치 명확히 말로 꺼내지 못하더라도, 사랑에 빠진 순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차원의 욕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렇듯 라캉의 실재는 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 마주하는 근원적 떨림과 무관하지 않다.
칸트의 이성비판을 잠깐 떠올려보자. 칸트가 말하는 실재(물자체)는 우리의 인식 범주나 감성적 틀을 벗어나 있기에, 도무지 우리가 알 길이 없고, 그래서 더욱 '추구'되곤 하는 대상이다. 칸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살아가며 현상(Phenomenon)만 볼 뿐이고, 그 너머에 있는 실재(물자체)는 결코 들여다볼 수 없다.
그런데 라캉은 오히려 인간이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는 게 아니라, '경험할 수 없으면서도 욕망해버리는' 그 지점에 주목한다. 우리는 상징과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을 해석하지만, 언젠가 그 틈에서 새어 들어오는 균열, 곧 '실재'의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한 번 붙잡았다고 생각하면 이내 놓쳐버리고, 놓친 줄 알면 또다시 엿보이는 이 아이러니가 바로 라캉식 실재가 가진 매력이다.
칸트가 말했다면 '그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니, 이성의 지나친 욕심을 자제합시다'였겠지만, 라캉은 '그 결핍이야말로 당신을 끌어당기고, 영원히 떨리게 하는 역동적 힘'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이 결핍과 욕망의 구도를 단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일상과 감정 속에서 얼마나 자주 마주하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라캉의 3대 개념인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는 사랑 속에서도 직접 목도된다.
상상계: 우리가 연애의 순간 흔히 만드는 달콤한 환상들. 상대를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리기도 하고, 스스로를 멋진 로맨티시스트라고 상상하기도 한다.
상징계: 연애에서 빠질 수 없는 말, 규칙, 사회적 제도, 윤리,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온갖 소통 수단.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해' '보고 싶어' 같은 말이 필요한 것도 상징계의 힘이다.
실재계: 하지만 이 모든 걸로도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사랑 안에서 느껴지는 '근원적 떨림'이나 자꾸만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욕망, 혹은 불안. 상징으로 재현 불가능한 어떤 순간이 우리를 덮쳐올 때, 우리는 상징계를 살짝 비틀고 균열을 일으키며 그 '실재'를 엿보게 된다.
이 책에서 장용순은 라캉만이 아니라 바디우와 들뢰즈의 사유 또한 함께 조명한다. 특히 바디우의 철학에서 ‘사랑’은 하나의 사건이자 진리절차로 여겨진다. '둘이서 동시에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이 바로 사랑의 사건이며, 여기에서 또 다른 '실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들뢰즈의 철학은 다소 급진적인 흐름으로 욕망을 자유롭게 흘려보내지만, 이 역시 사랑에서 배제되기 힘든 동력이 아닐까.
우리는 이 책을 단순히 '이론의 집합'이 아니라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로 읽어볼 수 있다. 세 명의 철학자(라캉, 바디우, 들뢰즈)가 펼쳐 보이는 세계관은, 마치 서로 다른 감독이 바라본 '사랑'이라는 영화를 한꺼번에 상영하는 것처럼 풍부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라캉: 사랑은 결핍에서 온다. 말해지지 않는 것, 그러나 끊임없이 말해지고 싶어지는 것.
바디우: 사랑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의 '사건'처럼 찾아온다. 그 만남은 둘의 삶을 새로운 진리로 재편한다.
들뢰즈: 사랑은 흐름이며, 이 흐름에서 개체와 개체는 서로 섞이고 변주된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창조적 욕망의 장.
이들의 세계관을 살펴 보고 나면, 결국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삶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누구도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끌림과 기대, 혹은 불안을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실재'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장면인지도 모른다.
칸트의 철학이 '경험될 수 없는 실재'를 한계 지음으로써 '이성의 욕망에 브레이크를 거는' 작업을 했다면, 니체 이후 라캉에 이르러서는 그 한계를 넘어서는 '욕망 자체의 필연성'을 본다. <라캉, 바디우, 들뢰즈의 세계관>을 통해 우리는 라캉의 실재가 한낱 공허한 불가능성이 아니라, 현실 속에 부단히 파장을 일으키며 우리 욕망을 자극하고 이끌어내는 '무대 뒤의 목소리'임을 체감하게 된다.
나는 이 글이 영화평론을 닮았다면 좋겠다. 왜냐하면 철학 텍스트 또한 삶의 다양한 장면들, 곧 '연애'에서부터 '우정', '예술적 영감', 심지어 '고독'에 이르기까지 내면의 드라마를 읽는 일이기 때문이다. 장용순의 책은 이런 면에서 하나의 창문을 열어준다. 그 창문 너머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바로 '끝내 붙잡히지 않지만, 결코 놓아버릴 수 없는' 실재라는 이름의 흔들림.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사랑'일 것이다.
칸트적인 시선과 라캉, 바디우, 들뢰즈적 사유 사이를 가로지르며 독서의 여정을 마친 후, 독자인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경험할 수 없어서 오히려 더 간절히 갈망하게 되는 무언가가, 결국 우리를 사랑으로 이끈다. 그 실재는 우리가 평생 붙잡지 못할지라도, 언젠가 잠깐 마주쳤던 순간의 설렘이 스크린 속 빛처럼 아른거릴 것이다.'
그 아른거림이야말로, 이 책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그 어떤 스토리보다도 깊이 있는 이 '실재'라는 낯선 주인공을 탐험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이름의 극장으로 계속 걸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