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독후감
오늘날 우리는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곳곳에서 부상하는 신나치주의와 같은 반동적 사회 현상에도 우려를 느낍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별개였습니다. 저 역시 기후 과학 보고서와 사회 뉴스를 접하면서도 일상에서는 무력감 속에 '방관자'로 지내온 독자입니다.
이러한 저에게 브뤼노 라투르와 니콜라이 슐츠의 <녹색 계급의 출현>은 커다란 물음을 던집니다. 과연 지구적 위기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정치적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 이 책은 기후위기를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로 재규정하며, 우리 스스로를 새로운 정치 주체인 '녹색 계급'으로 자각할 것을 촉구합니다.
"왜 기후위기에 대한 지식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라투르와 슐츠가 던지는 이 근본적 질문은 현대 사회의 딜레마를 정확히 짚어냅니다.
생태학은 이미 공론장의 주목을 받아왔지만, 과학으로서의 생태 담론은 지나치게 교육적 방식에 머물러 정치적 대응을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계몽주의적 낙관 속에 '알면 행동할 것'이라 믿었으나, 정작 기후와 생태계를 구할 실질적 행동은 여전히 부재합니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생태 문제가 더 이상 모두가 합의하는 '상식'이 아니라 명확한 갈등과 대립의 장임을 인정하자고 제안합니다.
가뭄 시기의 물 분쟁,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마찰, 탄소 배출량 규제치를 둘러싼 논쟁 등 수많은 사례가 보여주듯이, 자연은 우리를 하나로 묶기보다는 갈등의 '황금사과'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분쟁의 밑바탕에는 끊임없는 생산 확대를 향한 욕망과 현대 생산 체제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들은 묻습니다. 이제 생태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계급 투쟁을 상상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기후위기를 해결하려면 생태적 가치를 정치의 중심에 놓고, 과거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처럼 새로운 이념적 좌표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제시되는 개념이 바로 '녹색 계급'입니다. 기존의 마르크스 계급 개념을 변용하여, 인간 사회의 '생산 조건'이 아니라 지구 생태계라는 '생성 조건'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계급의식을 제안합니다.
이것은 생산을 위한 노동력이나 자본의 소유 여부가 아니라, 인류가 거주 가능한 환경(지구)의 유지 여부가 정치적 대립의 축이 됨을 뜻합니다. 요컨대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는가'가 아니라 '인간이 거주하는 지구의 조건을 누가 지키려 하는가'로 편이 갈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녹색 계급은 아직 잠재적 다수파일 뿐 명확한 이념과 정체성을 갖추지 못한 채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움직임입니다. 예컨대 세계 곳곳의 기후행동 시위나 풀뿌리 운동이 그 전조일 수 있습니다.
라투르와 슐츠는 이 흩어진 움직임에 '계급'이라는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서로 연대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자각하도록 돕고자 합니다. 전통적 계급이론이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이 삶의 기반이며 누구와 맞서 싸워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도구였듯이, 오늘날 생태계급 담론이 우리의 위치와 적대를 분명히 인식하도록 하는 지도가 될 수 있다는 기대입니다.
라투르와 슐츠의 논지는 산업주의적 근대성 자체에 대한 급진적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말하는 생산은 더 이상 인간의 생산만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자연계 자체도 하나의 생산자로서 다른 종, 생태계, 토양, 대기와 해양에 이르기까지 물질적 생산성과 한계를 지닌 주체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인류는 끝없는 생산력의 증대를 추구하며 이 자연의 한계를 무시해왔고, 그 결과 생산 체제가 곧 파괴 체제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고 진단합니다. 마르크스가 산업의 생산력을 진보의 원동력으로 긍정했던 데 비해, 이제 생산=파괴의 동일시가 현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구 시스템의 관점에서 보면, 화석연료를 태워 만들어낸 경제 성장의 총량 만큼 기후 파괴와 생태계 파괴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기존 성장 중심 세계 질서가 인간과 자연을 향한 칼날이었음은 이제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추구해야 할 것은 더 이상 발전이 아니라 거주 가능성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아우르는 생성 시스템만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생성'이란 자연과 조화롭게 순환하며 생명을 살리는 활동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생태 사회주의 진영의 비판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저명한 생태사회주의자 안드레아스 말름을 비롯한 이들은 오래전부터 기후위기의 근본 원인이 화석연료에 기반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있음을 강조해왔습니다.
실제로 기후변화는 인류 전체가 고르게 일으킨 재앙이 아니라, 산업자본과 화석연료 기업, 그리고 끝없는 축적을 추구하는 지배계급이 구조적으로 야기한 사태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위기에 상응하는 해결책도 단순한 기술 혁신이나 녹색 소비생활 장려가 아니라, 생산 체제 자체의 전환이어야 합니다.
말름은 저서 <화석 자본> 등에서 산업혁명 이후 자본이 노동을 지배하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석탄과 석유에 의존한 과정을 밝히며, 기후위기는 곧 자본주의의 산물임을 설파했습니다.
이 점에서 라투르와 슐츠가 말하는 '생산의 논리에 맞선 집합적 이해관계'란 곧 자본권력에 맞선 생태계급의 이해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생태계급을 '파괴적 생산 논리를 중단시키고 지구 거주 조건을 수호하려는 집단'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생태사회주의가 말하는 '체제와의 투쟁'과 정확히 조응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제시하는 정치적 대립 구도가 전통적인 좌/우 이념과 교차하면서도 이를 재편성한다는 것입니다. 녹색 계급은 겉보기에 기존 좌파 운동의 연장선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착취와 희생에 반대하고 생산의 팽창을 저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녹색 계급은 한 치 오차 없이 좌파적이며, 기존 마르크스주의를 확장하는 움직임이라 평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라투르와 슐츠는 이 문제를 더 근본적 차원에서 봅니다. '생태 문제에 대해 논할 때, 누구에게 가장 가까움을 느끼고 누구와는 거리가 먼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새로운 편 가르기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정치의 스펙트럼은 '지구를 지키려는 자' 대 '지구를 등진 자'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 대응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과거 좌우를 막론하고 함께 '진보'로 분류되고, 반대로 생태 위기의 대응을 가로막거나 부정하는 세력은 '반동'으로 규정됩니다.
실제 현실 정치에서도 이러한 재편 조짐은 보입니다. 가령 기후변화 대응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는 정치인은 보수 정당 출신일지라도 젊은 층의 지지를 얻는 반면, 경제 성장만을 외치며 탄소감축을 회피하는 정치인은 진보 정당이어도 비판받는 식입니다.
요컨대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둘러싼 입장이 새로운 동지와 적을 결정짓는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라투르와 슐츠는 이러한 변화가 기존의 '진보=성장'이라는 등식을 파기한다고 봅니다. 오히려 문명의 지속 가능성을 염려하는 세력이야말로 최상의 이성을 대표하며, 이들의 대의 앞에 과거의 객관적 계급이익들은 보잘것없어 보인다고까지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생태계급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문명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진보세력이라는 선언입니다. 과연 21세기 인류 역사에서 '진보'란 무엇인지 그 개념 자체를 재규정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비판적 성찰도 가능합니다. 예컨대 일부 평론가들은 녹색 계급 담론이 과연 충분히 '녹색'인가 되묻습니다. 녹색 계급이 인류의 생존에만 초점을 맞추고 정작 비인간 생명 그 자체의 권리나 목소리에는 무관심한 것 아니냐는 지적입니다.
실제로 라투르 본인은 과거 저서들에서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가 함께 정치적 관계망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가이아 개념을 수용하여 지구 자체를 하나의 행위자로 인정하는 사상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번 책에서 '녹색 계급'은 여전히 인간 중심적 환경보호주의의 언어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는 곧 신유물론과 깊이 연결된 쟁점입니다.
라투르의 사상적 배경에는 소위 신유물론이라 불리는 흐름이 놓여 있습니다. 신유물론은 근대의 인간/자연 이분법을 넘어, 물질과 생명이 스스로 행위할 수 있는 주체임을 인정하자고 제안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돌멩이 하나, 강물 한 줄기도 단순한 배경이나 도구가 아니라 역사와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후위기는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근본에서 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산업화 시대 동안 대기 중에 축적된 CO2는 인간 사회의 시계를 흔드는 기후 변동으로 나타났고, 북극의 빙하는 녹아 해수면 상승으로 해안 도시들의 미래를 바꾸고 있습니다.
태풍과 산불,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비인간 세계의 반격이 이어지자, 비로소 우리는 물질 세계가 결코 수동적이지 않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신유물론이 말하듯이, '물질은 더 이상 수동적으로 변화에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행위하면서 인간의 세계를 관통한다'는 인식이 중요해진 것이지요.
따라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다시 맺고 동맹을 이루는 새로운 정치는 필수적입니다. 라투르는 이미 20여 년 전 '사물들의 의회'를 언급하며,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비인간 행위자들에게까지 대표성을 부여하는 정치를 상상한 바 있습니다.
이번 저서에서도 그는 인간 사회의 이해관계 (세계 "안")와 지구의 물질적 조건 (세계 "위")을 결합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농부든 노동자든 이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안정된 기후와 건강한 생태계가 필수임을 깨닫고, '살아가는 세계'와 '살게 해주는 세계'를 하나로 묶는 자각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녹색 계급의 정치는 곧 인간과 비인간의 연대 정치라 할 수 있습니다. 생태계급은 인간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생명 조건 자체를 대변하는 지구공동체의 대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녹색 계급의 출현> 본문에서 이러한 비인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제한적입니다. 이 부분은 저자들이 의도적으로 생태계급을 광범위한 대중정치의 담론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 중심적 서술을 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신유물론적 급진성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우선은 기후위기에 공감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정체성의 정치를 말하려 한 것이죠. 그렇다면 향후 과제는 녹색 계급 담론을 더 깊은 생태철학과 접목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포스트-휴먼 정치로 발전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새로운 정책 몇 가지가 아니라 세계관의 전환입니다. 라투르와 슐츠는 현대의 '진보=성장'이라는 등식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끊임없는 성장과 생산력 증대를 당연시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역사를 일직선의 화살표로 여기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뒤처진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기후위기의 시대에 이 직선적 시간관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저자들은 이를 하나의 차원만을 보는 잘못된 정신틀이라 지적하며, 이제 그 틀을 벗어나 여러 방향으로 조용히 움직이며 우리가 딛고 선 땅과 다시 접속하자고 제안합니다. 이 말은 곧 성장 신화를 버리고 순환의 논리를 받아들이자는 뜻일 것입니다.
실제로 자연계에는 직선형의 영원한 성장 따위는 없습니다. 모든 생태계는 순환하고 회복되는 고리 속에서 유지됩니다. '원형(圓形) 순환은 생존의 조건'이라고까지 말하며, 이미 농업과 임업 분야 최선의 지속가능 실천 사례들이 그러한 순환의 중요성을 입증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지속가능성의 예외들이 이제는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장의 자율에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파괴 수단의 통제'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파괴 수단이란 곧 대량생산과 소비를 부추기는 시장 메커니즘 및 지구적 군사력까지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다소 급진적으로 들리지만, 기후위기를 막으려면 경제 시스템과 군사산업까지 대대적 축소와 재편이 불가피하다는 견해입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생태사회주의의 구상, 즉 '체제의 급변경'과도 통하는 부분입니다.
말름 등은 기후위기가 이미 전시상황에 준한다고 보고, 전시 동원령에 버금가는 강력한 공적 개입(예컨대 화석연료 산업의 단계적 폐지나 국가적 통제)을 요구합니다. 라투르와 슐츠의 제언도 궁극적으로는 시장과 군사에 대한 민주적 통제로서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거대한 전환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입니다. 저자들 역시 인정하듯, 생태계급 앞에는 멀고도 험한 길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는 데 필요한 사상적 나침반이 바로 근대적 이념의 해체이고, 지속가능한 공동체로의 상상력입니다.
우리 각자가 내면화한 성장주의, 인간중심주의 이데올로기를 성찰하며 벗어날 때, 비로소 다른 미래를 실천할 준비가 갖춰질 것입니다.
<녹색 계급의 출현>을 읽으며 특히 반성하게 된 지점은 행동의 주체에 대한 문제입니다. 앞서 말했듯 저 역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나 한 사람 실천으로 무엇이 달라질까" 하는 생각에 스스로를 방관자 위치에 두었습니다.
일회용 컵을 줄이고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는 등의 개인적 실천만으로는 거대한 위기를 막기 힘들다는 자조 섞인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책은 오히려 그러한 개인주의적 접근의 함정을 일깨웁니다.
독서를 위한 자료조사를 위해 구글링을 하다 일본의 사상가 사이토 코헤이의 문장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그런 선의만으로는 무의미할 뿐이다. 오히려 유해하기까지 하다"는, 다소 뼈아픈 문장입니다. 개개인이 소소한 노력만 하고 안도해버린다면, 정작 필요한 싸움에 나서지 않게 만드는 자기위안과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한국의 한 환경단체는 플라스틱 컵 사용을 전국민이 다 멈춰도, 신규 석탄화력발전소 한 곳의 연간 배출량의 1.3% 감축에 불과하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이렇듯 위기의 원인은 거대한데 해결을 개인의 덕목으로 환원하면, 구조적 대응은 실종되고 말지요.
라투르와 슐츠가 강조하는 집합적 이해관계란 결국 이러한 개인화된 책임감을 넘어, 우리라는 주체로 행동해야 함을 뜻합니다. 기후위기는 어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고, 따라서 해법도 사회적이어야 합니다.
저자들이 계급이라는 개념을 부활시킨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가 하나의 계급으로 뭉친다는 것은, 개인의 윤리적 결단을 넘어서는 정치 공동체의 형성을 의미합니다. 이는 민주주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 수 있습니다.
19세기 노동계급이 자기 이해를 자각하고 권리를 쟁취하기까지 오랜 각성과 투쟁의 시간이 필요했듯이, 생태계급 또한 그런 역사적 주체형성 과정을 밟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에겐 그만큼의 시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산업자본 등장 이후 노동운동이 성과를 내는 데 수십 년, 길게는 한 세기가 걸렸다 해도 지구는 그만큼 기다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생태계급은 예전의 계급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더욱 단호하고 의식적인 단계에 진입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망설일 겨를이 없습니다. 이 거대한 전환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집합적 행동으로 성큼 내딛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거리 시위 참여이든, 투표를 통한 압력이든, 직장에서의 전환운동이든, 방식은 다양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침묵의 대다수로 남지 않고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시민이 되는 일입니다. 바로 그때 비로소 '잠재적 다수파'인 녹색 계급이 실질적 다수파로서 세상을 바꾸기 시작할 것입니다.
<녹색 계급의 출현>은 지식으로 무장한 독자를 행동하는 주체로 일깨우는 일종의 메시지 모음집입니다(실제로 이 책은 76개의 짧은 메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을 덮으며 제게 남은 것은 거창한 이론이라기보다 실존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과연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기후위기의 시대, 나는 어떤 편에 설 것인가?
라투르와 슐츠는 오직 우리가 다가오는 기회를 붙잡을 능력을 발휘할 때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이 준엄한 경고는 제 무력한 관망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위기의식을 행동으로 바꾸는 용기, 바로 그것이 요구됩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들은 독자들에게 묻는 듯합니다. 과연 우리는 스스로를 녹색 계급으로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가? 이는 단순히 명칭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 양식과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지구를 위한 연대를 정체성의 핵심에 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저는 제 일상을 돌아보게 됩니다. 기후위기와 사회 불의를 알면서도 외면해온 순간들, 편리함과 익숙함 속에 지속불가능한 선택을 해온 습관들 말입니다. 이제는 달라져야겠습니다.
다르게 산다는 것, 그것은 거창한 영웅적 행동이 아니라 가치 기준의 전환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저는 작은 실천부터라도 기후 정의를 염두에 두고 선택하려 합니다. 동시에 더 중요한 것은, 저 혼자가 아닌 타인들과 손을 잡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주변의 친구, 동료들과 기후위기에 대해 더 자주 이야기하고, 지역의 환경 모임이나 캠페인에 참여해보려 합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공통된 정체성으로 가능한 희망의 방향으로 달려갈 때 비로소 미래를 바꿀 힘이 생길 테니까요.
변화시킬 수 있는 미래의 영역은 날마다 줄어들고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저는 이제 희망을 행동으로 증명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지구와 함께 사는 법을 다시 배워가는 삶, 그것이 이 책이 제게 가르쳐준 앞으로의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