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를 읽었습니다.
지구를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로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과학적 가설 이상의 무언가를 품고 있다.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이 <가이아>에서 제안한 이 파격적인 관점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행성을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든다. 러브록은 지구상의 생물과 무생물을 모두 포괄하는 복합계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간주하고, 이를 그리스 신화의 대지의 여신 이름을 따 ‘가이아(Gaia)’라고 명명했다.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느꼈던 감각을 기억한다. 익숙한 과학책의 냉정함과는 다른, 어딘가 시적인 울림이 있었다. 러브록은 데이터와 가설을 나열하면서도, 동시에 지구라는 존재에 대한 일종의 경외를 전달하고 있었다.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이 가진 힘은 무엇보다 통합에 있다. 그는 대기 조성, 해양의 염분 농도, 기후의 장기적 안정성 등이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생명체의 작용에 의해 유지된다고 보았다. 지구가 생물과 무생물의 복합체로 이루어진 거대한 유기체처럼 기능한다는 이 관점은, 그때까지 분리되어 연구되던 지질학, 기후학, 생물학을 하나의 큰 그림 안에 담아냈다.
러브록이 던진 질문들은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이다. 바다는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염분 농도를 유지해왔는가? 무수한 지질학적 재난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기온은 왜 생물이 살 수 있는 범위 안에 머물렀는가? 대재난 속에서도 생명은 어떻게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진화를 계속할 수 있었는가? 가이아 이론은 이 오래된 수수께끼들에 하나의 일관된 설명을 제시했고, 그것이 이 가설의 매력이자 강점이었다.
물론 초기에는 거센 반발이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가설이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근거가 빈약하다고 비판했고, 과학보다는 신화나 뉴에이지적 공상에 가깝다는 시선도 존재했다. 러브록 자신도 초기 논문들이 주요 학술지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경험을 언급하며, 가이아 관련 연구가 환영받지 못했던 시절을 회고한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축적된 연구와 토론을 거치며, 가이아 가설은 점차 과학적 신뢰성을 쌓아갔다. 1970년대 처음 제안된 이래, 이 이론은 지구의 역사와 자연을 탐구하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진지하게 연구 및 검토되었다.
<가이아>의 대중적 성공도 주목할 만하다. 러브록은 이 책이 처음부터 일반 대중을 위해 쓰였다고 밝히고 있으며, 실제로 복잡한 지구과학의 내용을 놀라울 만큼 읽기 쉬운 문장으로 풀어냈다. 가이아라는 이름과 개념은 과학계를 넘어 철학, 종교, 환경운동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나갔다. 출판 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한 독자를 확보하며 장기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이 책이 단순한 과학서를 넘어 하나의 세계관을 전달했음을 보여준다.
러브록의 가이아 담론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아마도 핵에너지에 대한 그의 입장일 것이다. 그는 당대 주류 환경운동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원자력 발전을 옹호했고, 핵에 대한 공포가 과학적으로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가이아> 본문에서 러브록은 극단적 환경론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인다. 일부 생태주의자들이 현대 과학기술, 특히 원자력 같은 위험한 기술을 완전히 포기해야 인류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그는 ‘과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매우 회의적’이라고 일축한다. 첨단 기술을 해체하고 파괴함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다는 급진적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인간사회의 폭력성을 논하면서,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반대하는 환경운동가들의 폭력 시위를 예로 들기도 한다. 겉으로는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이면에는 인간 특유의 공격성이 있다는 것이다. 러브록은 핵기술 그 자체보다는 인간의 탐욕과 오만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입장에 가깝다. 그에게 핵에너지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현실적 수단이었고, 방사능 위험에 대한 공포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었다.
이런 관점은 환경주의 진영, 특히 탈핵의 입장에서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가 보여주었듯이, 원자력 발전은 통제력을 상실할 경우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피해를 초래한다. 러브록은 ‘제아무리 참혹한 핵전쟁이라도 가이아를 완전히 괴멸시킬 수는 없다’고 단언했지만, 이것이 그 지역 생태계와 주민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가이아의 시간 척도로 보면 일시적인 사건일지 몰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의 시간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기 때문이다.
핵폐기물의 문제도 있다. 방사성 폐기물은 수십만 년 동안 생태계에 잠재적 위협을 가한다. 가이아의 시간 척도에서는 찰나일지 모르지만, 미래 세대의 관점에서는 엄청난 윤리적 부담이다. 현 세대의 에너지 욕구를 위해 미래 세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을 떠넘기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 물음에 러브록의 담론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이것을 단순히 ‘틀렸다’고 말하기보다는, 러브록이 바라보던 시간의 척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언제나 지구 전체의 관점에서 사고했고, 수십억 년의 역사 속에서 인류의 위치를 상대화했다. 그 거시적 시선이 때로는 냉혹하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주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 겸손이 책임의 회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일 것이다.
<가이아>를 읽으면서 계속 느꼈던 것은, 이 책이 과학서인 동시에 일종의 서사라는 점이었다. 러브록의 글은 지질학적 데이터와 생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하면서도, 지구를 살아 있는 존재로 묘사하는 큰 이야기의 틀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구를 그리스 신화의 여신에 비유하고, 데이지월드(Daisyworld)라는 가상의 행성 모델을 통해 생태계의 자기조절 메커니즘을 우화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양날의 검이었다. 한편으로 독자들은 복잡한 과학 원리를 하나의 유기적인 드라마로 상상할 수 있었고, 지구에 대한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가이아>가 대중적으로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분명 이 서사적 매력 때문이었다. 과학책을 읽으면서도 마치 한 편의 철학 동화나 SF적 상상을 접하는 듯한 느낌. 그것이 이 책만의 독특한 색채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런 접근은 ‘과학이 아니라 신화나 사이비과학’이라는 비난을 불러오기도 했다.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의인화하는 발상이 전통 종교나 뉴에이지 운동의 생명숭배 사상과 혼동되면서 과학계 안팎에서 논란이 일었다. 러브록 이전에도 지구를 유기체로 보는 생각은 종종 있었지만, 그것은 막연한 관념에 머물렀다. 러브록은 이에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고 과학적으로 추구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그 서술의 일부 톤이 지나치게 생기론적으로 들릴 때 과학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결국 러브록의 서술 방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설득력 있는 비유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개념 이해를 도왔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과학적 과장으로 비춰졌다. 중요한 것은, 이 양면성 자체가 <가이아>라는 책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점이다. 이 책은 순수한 과학서도, 순수한 철학서도 아니다. 그 경계에서 독특한 울림을 만들어낸 작품이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에 깊이 천착한 철학자다. <가이아 대면하기(Facing Gaia)>,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등의 저작에서 그는 가이아 개념을 자신의 철학으로 재해석했다. 그리고 그 재해석은 러브록의 원래 구상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라투르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가이아를 ‘하나의 유기체’가 아니라 수많은 이질적 행위자들의 네트워크로 보는 것이다. 러브록이 가이아를 단일한 자기조절 시스템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면, 라투르는 그것을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actants)들이 서로 얽히고 협상하는 분산된 집합체로 재해석한다. 가이아에는 중심이 없다. 의도도, 목적도 없다. 다만 무수한 행위자들(대기, 해양, 미생물, 인간, 기계)이 서로 얽히고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어떤 효과가 창발할 뿐이다.
이렇게 보면 ‘가이아가 스스로 조절한다’는 러브록의 표현이 갖는 목적론적 뉘앙스를 피할 수 있다. 가이아에는 어떤 초월적 의지나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에서 귀결적으로 조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화적 은유에서 벗어나 네트워크의 역동적 균형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라투르의 전략이다.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의 핵심 테제를 적용하면, 러브록의 가이아가 여전히 ‘자연’이라는 범주 안에 머무른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러브록은 가이아를 인간과 구별되는 거대한 자연 시스템으로 놓고, 인간을 그 ‘부수기관’으로 위치짓는다. 하지만 라투르에게 자연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근대가 만들어낸 허구다. 가이아는 ‘자연’이 아니라 하이브리드들의 집합이며, 인간의 기술과 도시와 정치도 가이아의 일부로 재편입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라투르에게 가이아는 단순히 과학적 연구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협상해야 할 정치적 상대다. <자연의 정치>에서 그가 말한 ‘사물의 의회(parliament of things)’를 떠올려보면, 가이아 안의 비인간 존재들(대기, 해양, 미생물들)도 정치적 대표성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 관점에서 보면 러브록의 핵발전 옹호는 흥미로운 비판 지점이 된다. 핵발전이라는 기술적 해결책은 정치적 과정을 우회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가이아 문제는 기술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집합적 정치를 요구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라투르의 말년 작업에서 핵심 개념인 ‘지구적 존재(Terrestrial)가 되기’도 가이아 논의와 연결된다. 인간이 지질학적 힘이 된 인류세 시대에, 우리는 더 이상 지구 위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 지구와 함께 얽힌 존재로 스스로를 재정의해야 한다. 러브록이 인간을 가이아의 ‘부수기관’으로 격하시켰다면, 라투르는 다른 방향을 제안한다. 인간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의 위계 자체를 해체하고 상호의존의 네트워크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으로 대표되는 생태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가이아>에 대한 비판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날카로워진다. 라투르가 존재론적 차원에서 가이아를 재해석한다면, 말름은 정치경제학적 차원에서 가이아 담론의 한계를 폭로한다.
말름의 핵심 비판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것이다. 기후변화의 원인을 인류 전체로 돌리는 것은 책임을 균등하게 분산시켜 진짜 원인을 은폐한다. 러브록은 ‘인간 종족’이 가이아에 미치는 영향을 말하지만, 말름이라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어떤 인간?”
방글라데시 농민과 화석연료 기업 CEO를 같은 ‘인류’로 묶을 수 있는가? 역사적으로 화석연료 사용은 19세기 영국 자본가 계급의 결정이었고, 현재도 배출량은 계급과 지역에 따라 극심하게 불균등하다. 전 세계 상위 10%가 전체 배출량의 절반을 책임진다는 통계를 생각하면, ‘인류’라는 범주는 정치적으로 무력한 추상이 되어버린다.
말름은 ‘인류세’ 대신 ‘자본세(Capitalocene)’라는 개념을 지지한다. 기후변화의 원인은 인류가 아니라 자본주의, 특히 화석연료 자본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가이아>를 읽으면 눈에 띄는 것은, 러브록이 환경 문제를 논하면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분석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는 ‘인간의 탐욕과 권력욕’을 언급하지만, 이를 인간 본성의 문제로 환원해버린다. 탐욕은 인간 본성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경제 체제가 구조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성장과 축적을 요구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을 착취 대상으로 만든다. 이 체제를 문제 삼지 않으면서 ‘인류’의 오만을 탓하는 것은, 마치 병의 원인을 진단하지 않고 증상만 나열하는 것과 같다.
러브록의 핵발전 옹호는 말름이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술적 해결책’ 사고방식의 전형이기도 하다. 체제 변화 없이 기술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태양지구공학이든, 탄소포집이든, 원자력이든)은 자본주의를 온존시키면서 그 모순을 기술로 봉합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핵발전소를 누가 소유하고, 누가 이윤을 가져가며, 핵폐기물은 어디에 묻히는가? 기술은 진공 상태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핵발전은 또 하나의 상품이 되고, 그 위험과 비용은 불균등하게 분배된다.
가이아를 거대한 자기조절 시스템으로 보는 러브록의 관점은 정치적 투쟁의 긴급성을 약화시킬 위험도 있다. ‘가이아는 스스로를 조절해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라는 서사는 일종의 체념이나 수동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말름은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에서 기후변화를 ‘만성적 비상사태’로 규정하고, 전시 동원에 버금가는 급진적 국가 개입을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러브록의 가이아 담론은 너무 느긋하다. 수천 년 단위의 피드백 시간상수를 논하는 동안, 지금 당장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러브록이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반대하며 폭력 시위를 벌이는 환경운동가들을 ‘인간 본성의 공격성’으로 치부한 대목도 흥미로운 논쟁 지점이다. 말름의 <파이프라인을 폭파하는 방법(How to Blow Up a Pipeline)>은 화석연료 인프라에 대한 직접 행동(재산 파괴를 포함한)의 정당성을 정면으로 논한다. 그에게 이런 행동은 ‘폭력’이 아니라 기후 비상사태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다. 진짜 폭력은 매일 배출되는 탄소가 미래 세대와 글로벌 사우스에 가하는 구조적 폭력이라는 것이다. 러브록이 환경운동의 급진성을 인간 본성으로 환원한 것은, 이 관점에서 보면 정치를 심리학으로 대체하는 탈정치화 전략으로 읽힌다.
흥미롭게도 말름은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도 비판한다. <이 폭풍의 전개(The Progress of This Storm)>에서 그는 비인간에게 행위성(agency)을 부여하는 신유물론이 인간의 정치적 책임을 흐리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을 해체한다’는 라투르의 프로젝트는 이론적으로는 세련되지만, 실천적으로는 문제가 있다. 기후변화는 ‘인간과 비인간의 네트워크’가 만든 게 아니라, 특정한 인간 집단이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내린 결정의 결과다. 비인간 행위자들에게 책임을 분산시키는 것은 진짜 책임자들(화석연료 기업, 그것을 지원하는 정부)을 면책해주는 효과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러브록의 가이아도 비판받을 수 있다. ‘가이아가 스스로를 조절한다’는 서사는 인간 행위자의 책임을 거대한 시스템 안에 용해시켜버린다. 라투르와 말름은 러브록을 비판하는 방향이 다르지만(라투르는 가이아의 통일성을 해체하려 하고, 말름은 인간 책임의 특정성을 복원하려 한다)둘 다 러브록의 가이아 담론이 갖는 탈정치화 효과를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가이아>를 덮으면서 드는 생각은, 이 책이 던진 질문들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지구는 과연 살아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그 속에서 어떤 존재인가? 러브록의 가설은 완벽한 정답이 아니었지만, 인류가 스스로를 성찰하고 지구와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데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동시에 이 책은 여러 방향에서 비판적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라투르는 묻는다.
“가이아를 단일한 유기체로 보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가이아에는 중심도 목적도 없는 것이 아닌가?”
말름은 묻는다.
“‘인류’라는 추상적 범주가 진짜 책임자를 은폐하는 것은 아닌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 없이 환경 문제를 논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질문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지만, 모두 러브록의 가이아 담론이 갖는 정치적 함의를 묻고 있다.
어쩌면 <가이아>의 가치는 정답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구공동체 의식을 일깨우면서, 동시에 그 의식이 어떤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는지를 묻는다. 러브록의 유산은 비판과 함께 계승되어, 보다 정교한 이론과 균형 잡힌 환경 철학으로 가다듬어져야 할 것이다.
결국 이 책은 그 한계들까지도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작품이다. 인간과 지구 생태계의 관계를 재고하게 만든 점에서, 그리고 그 재고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을 촉발한 점에서, 시대를 앞서간 하나의 사유 실험이자 초대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