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세계시민교육 강사 학습동아리 워크숍 날이다. 자고 있는 식구들을 두고 일찍 나와 지도 앱 길찾기를 해본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 오니 11분이나 남아 책을 꺼내보지만 주변의 동태에 나는 금방 산만해졌다. 공기를 가득 채운 가을 햇살이 말했다. 이 좋은 가을 아침에 무슨 책이냐, 주변을 좀 봐.
뒤에서 평화롭게 버스를 기다리던 한 여자는 어딘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아, 진짜? 그럼 어떡하지?"
아주 다급하게 정류장을 떠나갔다. 평온한 것 같던 일상의 아침에도 예상치 못한 일은 찾아든다.
절뚝거리듯 느슨하게 달리는 뒷모습이 중학생 정도의 학부모일까 생각이 들며 집에서 엄마의 도움을 급박하게 기다리는 새끼들이 연상된다.
버스에 올라타는 발걸음. 마치 내 모습같은.
버스가 왔다. 내가 탈 버스는 아니다.
나와 다른 노선으로 갈 사람들이 줄지어 먼저 떠난다. 앞사람의 발이 떠난 자리에 천천히 들어서는 발걸음. 오늘도 고단할지 모르는 검은색 운동화에 그래도 한 템포의 여유가 담겨있다.
나는 먼저 떠나는 사람들을 볼 때 저 사람은 어디로 갈까 상상한다. 큰 가방을 메고 운동복을 입은 걸 보니 주말 아침 일찍부터 학원에 가나. 운동복은 정신건강 몸 건강을 위해 시간을 들일 사치를 부릴 수 없는, 맨몸 청춘의 무언가가 있다. 토요일에도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피로가 얼굴에 스며있다.
스쳐 지나가며 나만 그의 얼굴을 보았다는 일방적인 일면식만으로, 나는 그의 수험생활이 성공적이길 바라는 행운의 화살기도를 쏴본다.
어떤 아주머니는 작은 쇼핑백을 추스르며 급히 버스에 올라탔다. 쇼핑백은 현대백화점인데 그 안에는 일하다 먹을 도시락이 들어있을 것 같다.
백화점 쇼핑백이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걸 보면 아마도 지갑 같은 잡화나 화장품, 액세서리를 샀으리라.
우리는(서민이라 칭하는 꽤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끔 그렇게 아주 큰 맘먹고 작은 사치를 누리고, 그것이 떠나간 자리에 도시락 같은 일상의 무게를 담는다.
옆에 앉은 사람은 마스크를 조금 내려 그 틈으로 편의점에서 산 도넛을 야금야금 먹는다. 차 먼지 나는 대로변에서 찬 생수와 도넛을 마스크를 다 내리지도 못 한채 먹는 모습이 그럼에도 아침을 챙겨 먹으려는 의지가 느껴져서 측은하기도 하고 공감되기도 한다. 그녀는 당이 필요한가 보다. 살다보면 가끔은 그렇게 절실하게 당이 당길 때가 있다.
다음 버스가 왔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버스 정류장 근처의 정자 아래, 상가 지붕 밑에서 핸드폰을 하던 마스크맨들이 갑자기 몰려들었다.
몇 분단위로 나타나는 병목현상을 보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아침마다 버스에 타기 위해 스치는 사람만 해도 평생 모으면 서울 인구는 되겠다 생각하니 인연의 규모가 엄청나다.
내 버스가 왔다. 나를 태워줄 거라는 고마움만으로 내가 탈 이 버스는 내 버스가 됐다. 나 역시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에 타기 위해 내려설 때마다 친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미국 여행 중에 기다리던 버스가 오길래 한국에서 하듯 차도에 내려섰더니 기사 아저씨가 죽고 싶냐고 미쳤냐고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단다.
나는 그게 진심으로 승객의 안전을 걱정한 프로 기사의 잔소리이길 바란다. 유색 여행객에게 유난히 지나치게 반응한 스트레스 폭발이 아니라.
아무튼 나는 오늘 아무 욕도 듣지 않고, 백발의 젠틀한 느낌이 풍기는 기사님께 인사를 하며 버스기사를 하시기 전에 무슨 일을 하셨을까 생각하고 자리에 앉아 버스정류장에 남은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잘 가요. 어디서든 오늘 잘 살고 다시 동네로 돌아오자고요. 우리의 쉼터로.
토요일 아침 에스컬레이터는 한결 한가하지만 그래도 바쁜 사람은 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15분을 왔다. 평일에는 사람으로 꽉 차 있던 계단과 에스컬레이터에 모처럼 여백이 생겼다. 이런 아침은 에스컬레이터도 더 느리게움직이는 것 같다.
나는 주로 지하철 역에서 계단으로 다닌다. 에스컬레이터에 가만히 서 있으면 걷고 싶은데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걸으면 안 그래도 급한 마음이 더 조급 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나도 더 천천히 올라가는 것 같은 에스컬레이터에 가만히 몸을 맡겨본다.
대로 위 덤프트럭과 택시
한강을 따라 쭉 뻗은 8차선 도로가 한가하다. 그래도 택시와 버스와 트럭만은 늘 있다. 저 큰 덤프트럭은 밤새 전국의 어느 고속도로를 달려 오늘 아침 이곳에 닿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사람들이 쉴 때에도 쉬지 않는 도시의 개미들, 움직임으로 근면함을 증명하고 도시의 땅을 일구는 한결같은 존재들이다.
정원을 다듬는 조경사의 뒷모습. 외롭기보다는 보람된.
골목에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혼자 아침 바람을 느끼며 걷던 내 귀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보다 조금 더 부지런한 누군가가 아침일찍부터 나무를 다듬고 계셨다.
나무를 자르든 다듬든 심든 옮기든, 나무를 다루는 일은 햇볕이 뜨거운 대낮보다는 아침이 좋다.
아침 햇살처럼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생명이다.
이렇게 골목골목 문이 닫혀있는 상점들이 보이면 도시가 아직 잠에서 덜 깼음을 실감한다. 기쁨과 회한과 끝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금요일 밤새도록 들어준 이 골목은 어제의 여운을 간직한 채 아직 꿈을 꾸고 있다.
도로변 주차요금 정산소가 보인다. 어쩌다 차를 끌고 서울에 올 때마다 주차가 고민이었는데 막상 서울에 살고 보니 어딜 가나 요금을 지불하고 주차하는 건 이제 당연하고, 자리가 있으면 감사할 정도가 되었다. 적응이 안 될 것 같던 주차문제는 이제 문제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잠깐 대놓은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가차 없음이 인색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어쩌면 이 작은 공간의 간단한 규칙 하나가 여기에 함께 사는 사람들의 평화와 질서를 지켜주는지도 모른다.
공무원인 친구가 썼던 책에서, I SEOU U 같은 문구를 보면 그 로고를 만들기 위해 공무원들이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를 생각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이 길은 맛깨비길이다. 골목 특성에 맞는 길 이름을 만들어내고 심지어 골목의 특성부터 발굴하느라 고심해야 하는 사람들의 노고가 귀여운 도깨비 얼굴 덕분에 해학적으로 다가온다. 맛깨비야 손님 좀 많이 데려와 봐.
나는 배우러 가고, 누군가는 일을 시작한 거리에 강아지와 산책 나온 사람이 걷고 있다. 토요일 아침 도시는 이렇게 때 이른 성실함과 쉼과 동행이 공존한다. 사람이 덜 채운 거리를 햇살과 나무 그림자가 채우고 가로수 어딘가에 앉아 보이지는 않지만 노래하는 새소리가 산뜻한,
나른한 활력의 공간이다.
바람을 만지는 중
아무 차도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는 주차장 입구, 작은 횡단보도에 혼자 걷는 내 그림자가 있었다.
많이 차가워진 공기가 따스한 햇살 덕분에 기분 좋게 서늘했다. 바람이 세게 불어 손끝과 머리카락으로 바람을 만질 수 있었다. 바람이 스쳐간 손끝이 시리고 펄럭인 재킷과 몸 사이가 시렸지만 그래서 더 상쾌했다.
토요일 아침 도시의 거리는 사람을 닮았다.
나른한 지난밤의 꿈, 함께 걷고 싶었던 존재와 오랜만에 함께 걸어보는 소소한 기쁨을 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