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 집이랑 똑같이 생긴 걸 보니 콩순이네도 구축아파트인가보다.
다섯 살 아들과 만화를 보다가 웃음이 났다. 콩순이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만화가 확실하구나. 만화 속 아파트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다니, 우습기도 하고 아파트 동 배열 모양까지 똑 닮은 게 신기해서 아들에게 말했다.
콩순이가 사는 아파트가 우리 집이랑 똑같이 생겼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아들이 어, 그러네. 하고 대답은 하는데 전혀 신기하지 않은 눈치다. 혹시, 너무 당연해서 신기할 게 없나? 아들의 머릿속에 있는 주인공들은 모두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아들이 보는 만화는 거의 다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타요는 대놓고 서울 4색 버스를 본 따 만든 만화라서 남산 버스도 나온다. 미니특공대나 헬로카봇에 나오는 배경은 누가 봐도 서울과 비슷한 모습의 도시이고 심지어 표지판도 똑같다. 콩순이가 엄마와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듯, 우리 아들도 대형마트에서 장을 본다. 가만 보니 뽀로로나 엄마까투리처럼 동물이 주인공인 만화를 빼고는 거의 다 도시가 배경이다.
만화가 그렇다면 아이들의 장난감도 도시와 관련된 것들이 많은 게 당연하다. 실제로 아이들은 콩순이의 마트 놀이, 타요버스 정류장 등 만화에서 나온 것들을 장난감으로 많이들 가지고 논다.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 중 하나는 5층짜리 주차타워다. 층마다 비탈진 커브길로 연결해 놓아 맨 위층에서 작은 자동차를 밀면 1층까지 쫙 미끄러져 내려온다. 다양하게 만들 수 있어서 창의력에 좋다고 생각하는 레고조차도 대부분 각 세트는 학교, 마트, 동물원, 놀이공원, 파티하우스 같은 도시 환경을 테마로 구성해서 판다. 시골에 사는 아이도 타요와 콩순이를 안다. 이 정도면 시골에 사는 아이들까지 놀이가 이루어지는 상상 속 배경은 자연스럽게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다. 도시에서 자라 도시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니 아이도 도시 사람으로 태어나 자라고 있는 셈이다. 아들이 처음 경험한 사회생활은 같은 아파트 단지, 앞 동 1층에 있는 가정형 어린이집이었다. 게다가 우리집은 수천 세대 아파트 단지가 한꺼번에 몰려있는 오래된 신도시였다. 친구들을 만나도 우리 집과 비슷하게 생긴 옆 단지아파트에서 논다. 놀이, 만남, 성장이 어딜가나 비슷한 배경에서 이루어진다.
나의 어린시절의 경험은 구도심 주택가의 모습을 하고 있듯, 아들에게는 아파트 단지의 모습으로 인식과 경험이 누적되고 있을 것이다. 아들은 흙바닥에서 축구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집 주변에서 축구를 했던 아파트 단지 내 장소들이 우레탄이 깔린 놀이터 공터나 보도블럭으로 된 넓은 공원마당이었기 때문이다. 이사오고 나서 어느 날 안양천 옆 모래 공터에서 축구를 하니 아들이 자꾸 발 속에 모래가 들어온다며 걷기 트랙에서 축구를 하려고 했다. 축구했던 땅에 관한 경험이, 아들의 불편함에 대한 인식과 취향까지 바뀌어 놓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경험이 대대손손 누적되면 경험으로부터 나온 사고방식이 디엔에이에 저장되어 이어진다. 아이들이 물려받는 생각과 생활 방식에는 도시생활에서 비롯된 것들이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2019년 우리나라 인구의 91.8%가 도시에 산다고 응답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듣고 놀랐다. 국토의 대부분이 도시화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한정적인 도시로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사람들이 도시를 찾아가는 이유는 도시에 일자리가 몰려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살기에는 결국 도시가 좋다는 인식이 무의식적으로 원래부터 뿌리박혀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시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어려서부터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결과 본능적으로 도시가 편안하고, 도시는 사람들의 그런 무의식을 먹으며 팽창한다.
정작 사는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도시는 그들의 삶에 스며들어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도시에 살며 눈으로 보고 무심코 스쳐 지나는 많은 장면이 무의식중에 각인되기도 하고 생각의 프레임을 만들기도 한다. 백화점 외벽 광고현수막에서 몸매가 아름다운 여자 연예인을 보고 순간 내 몸매를 비교하며 한숨이 나올 때, 나는 그냥 광고를 봤을 뿐이고 한숨을 쉰 것도 찰나이지만 내 안에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미지가 각인된다. 이조차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했음이 솔직히 맞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이어트를 한다. 도시의 장면 하나가 내 몸도 바꾸고 있다.
도시에는 그만의 흐름이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 몸을 싣거나 꽉 막힌 도로 위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어딘가로 출근하고 등교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리듬이 있다. 그 시간은 공간적 장면들과 함께 생체리듬과 사고의 패턴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도시에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점이 많을 것 같은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도시에서 경험하는 장면을 받아들이는 느낌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 미세한 차이들이 사람들 각자의 내면에 한겹한겹 쌓이면 큰 틈새를 만들고 개인을 돋보이게 하는 개성이 된다. 나라는 개인이 가진 고유성, 정체성이란 그 미묘한 차이들로부터 나오는데, 우리는 그 소소함을 사소하게 여기며 나도 날 잘 모르겠다고 쉽게 말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도시의 크기에 눌려 하찮게 흘려보냈던 느낌과 생각의 작은 조각들이 나라는 사람을 알려주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이들의 장난감의 팔 할은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겠지만 아이들이 같은 장면을 보고도 서로 다른 감정선과 눈으로 서로 다른 해석을 한다는 사실은 다행이다. 그 반응의 결과가 남과 같지 않은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줄 테니까.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도 나를 다 알지는 못한다. 어차피 나다운 나란, 하나의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내가 찾은 조각들로 하나하나 덧대어가는 퀼트조각보에 가깝다. 시간이 지나면 하나가 닳고, 잃어버리고, 또 다른 천 조각을 만나 채워나가는. 그래서 나를 이루는 조각들을 무심코 흘려보내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다. 그리고 그 조각은 결국 내가 사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누군지, 이 도시는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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