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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rdSong Oct 05. 2020

신분당선이었던 사람

지하철

서울은 버스시스템이 잘 되어있지 않아? 근데 넌 지하철을 좋아하네? 

순간 의아했다. 내가 이 복잡한 지하철을 좋아한다고?      




대전에 지하철이 생긴 것은 불과 1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지하철이라는 게 있는지는 알았지만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내가 처음으로 간접 경험한 지하철은 고 1 올라가는 겨울, 다른 도시의 지하철이었다. 신문에서 본 지하철 참사 때문인지 나에게 지하철은 어둡고, 사람을 가두고, 사고가 생기면 고독하게 죽어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소통이 되지 않는 지하의 네모 박스……. 스무 살,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지하철은 나에게 가장 낯선 문화였다. 어쩜 이렇게 서로 알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이, 역이 아니면 대피로도 없는 지하의 같은 공간에 가득하게 들어찰 수 있을까. 그렇게 지하철은 나에게 늘 새롭고, 약간은 두렵기도 한 신기한 존재였다. 


대학교를 인천으로 가면서 지하철 생활을 시작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사람들은 지쳐 보였다.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출근 중이든 퇴근 중이든 회사나 학교와 멀어질수록 좀 더 생기가 도는 건 확실한 것 같았다. 간혹 아침의 지하철, 미어지는 그 비좁은 곳에서 그 짧은 순간에도 무언가를 하느라 몰두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할 걸 하고 마는 그런 사람은 아침과 저녁의 표정의 차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정서적으로나 인지적으로 외부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누군가 나를 봤다면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하고 늦은 지하철을 탔다. 내 앞에 턱을 치켜들고 뒤로 넘어가라 잠에 빠진 여자가 있었다. 너무 두껍게 그려 눈을 감아도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은 아이라인은 우습기보다는 안쓰러웠다. 아침에 출근하고 이 시각에 퇴근하면 얼마나 피곤할까. 매일 저런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발은 얼마나 아플까. 아침에 출근해 쉼 없는 하루를 보내고 집이라는 자기만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꼭 그 밤 나를 종점에 내려주면 차고지로 들어갈 지하철을 닮아 있었다. 사람 인생이 지하철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서울 지하철은 단순한 인천 지하철과는 또 달랐다. 하루는 서울에 있는 사촌 오빠 집에서 자고 아침 일찍 인천에 가야 했다. 구로역에 인천이라고 쓰여 있는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탔다. 한참을 가도 내가 찾는 부평역은 나오지 않고 이상한 역명들이 방송에 나왔다. 그렇게 나는 병점까지 갔다. 같은 철도로 들어오는 지하철을 탔는데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나같이 지하철 잘 못 갈아타는 사람들은 어떻게 갈아타라는 건지 기가 막혔다. 서울 사람들은 어떻게 구별해서 타는 거지? 물론 지금 생각하면 아주 간단한 원리였다. 노란 전광판 글씨를 확인만 하면 되었다. 가끔은 사람 인생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도 내가 갈 줄 알았던 길 말고 딴 데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물어봤자 지금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해본다.     




pixabay @ Free-photos




수도권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내 활동반경도 넓어졌다. 나는 인천에서 지내니 서울에 사는 친한 친구들을 만나려면 주로 신촌, 홍대, 건대입구, 강남에서 만나는 것이 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호선만 타면 답답했다. 사실 2호선은 노선도만 봐도 마음이 답답해졌다. 초록색 길이 하나로 둥글게 묶여있다. 그 그림은 나에게 괴물로부터 도망가도 계속 제자리만 달리고 있는 무서운 꿈을 생각나게 했다. 2호선 노선도에 늘어서 있는 여러 대학 이름들 덕분에 생긴 ‘2호선을 타자’라는 약간은 듣기 거북한 급훈도 떠오른다. 


이런 느낌은 어쩌면 노선도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친구들을 자주 만났던 그 장소들은 젊음이 범람하는 곳들이다. 스무 살 내 눈에, 유수의 대학들을 품었다는 신촌은 겨우겨우 살아남아 있는 오래된 책방 하나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술집과 식당들로 가득했다. 내 동네가 아니기에 당연하기도 하지만 부어대고, 마시고, 네온사인이 눈 아프게 반짝이는 거리에 휘청거리는 젊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이방인임을 실감했다. 몇 달 뒤에 오면 전에 갔던 그 가게가 없어진 자리에 서서 마음은 더 쓸쓸했다. 2호선을 따라 즐비한 유흥가들의 술은 마르지도 않는다. 초록색 노선에 올라 좋은 대학 이름을 좇아 돌고 돌다가 멈춘 곳이 내 청춘이 머물 곳이 되어있는 대한민국 학생들의 인생. 둥글게 둘러싸인 2호선 따라 계속되는 그들의 방황도 멈추지 않고 순환한다. 

가끔 결국 나도 그들 중 하나라고 느껴질 때 나는 내가 불쌍했다.      


한번은 싱가포르 여행 중 알게 된 싱가포르인 친구가 한국에 왔다. 함께 서울의 명소들을 돌아보기로 했다. 강남역 일대를 걷는데 버스정류장을 보며 친구가 물었다. 


"서울은 버스시스템이 잘 되어있지 않아? 근데 넌 지하철을 좋아하네?"

 

순간 의아했다. 내가 이 복잡한 지하철을 좋아한다고? 뭘 봐서 그렇게 생각했냐 물으니 친구가 말하길, 내가 지하철 노선에 있는 명소만 찾아다녀서 그런 생각이 들더란다. 사실 난 서울시민이 아니라서 버스 이용은 잘 안 한다고, 복잡하고 헷갈린다고 대답했다. 일단 구차한 대답은 했는데 문득 나는 그동안 내가 아는 길, 정해진 역이 아니면 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에서 나들이를 할 때도 지하철만 타고 다니고 지하철 노선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곳은 찾아간 경험이 거의 없다. 늘 동선은 지하철역 근방 1km 이내에서 뱅뱅 돌았다. 지하철역입구 표지판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장 확실히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그렇게 안전한 길, 정해진 길만 거쳐 왔다. 미지의 곳을 가보는 것은 두렵고 귀찮고 복잡한 일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착하고 바른 학생이었고 중학교 때는 내신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모범생이었다. 학습 분위기가 좋고 ‘네임밸류 있는’ 대학에 잘 가려고 외고에 진학했고, 안정적이라는 교대를 거쳐 임용시험에 무사히 합격했다. 초, 중, 고 학창시절에는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은 일들은 아예 하지를 않았고 독서는 대학입시에 도움 되는 추천도서를 주로 읽었다. 대학입시 때도 재수를 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점수로 갈 수 있는 최선인 대학을 갔다. 어른이 되면서는 교사 외의 삶은 불안하고 보장되지 않은 무모한 길 같았다. 안전한 길을 놔두고 다른 길을 찾거나 조금 돌아가는 것은 시간과 체력의 무의미한 낭비였다. 


그런데 정말 진실은 그랬을까? 이제야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정해진 노선, 짧은 노선을 선택하지 않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더듬더듬 찾아갔다면 지금 내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 빠르고 정확하고 반복되는 신분당선 지하철 같은 내 인생, 이제와서 어딘가 다른 방향으로 가볼 수 있을까?      


서울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지하철이야말로 어쩌면 사람들이 서로를 여전히 신뢰한다는 가장 좋은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사고가 나면 지하에 갇힐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는 그곳에 그들은 또 같이 올라탄다. 그들은 서로에게 몸을 맞대고 기대며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각자의 길에 동반자가 되어주고 있다. 어떤 이는 자기가 가는 곳이 병점인지 인천인지도 알지도 못하고 타고 있는 걸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오늘도 화수분 같은 2호선 알코올의 힘을 빌려 청춘의 정수를 찾고 있을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내일은 다른 노선을 달려보리라 마음만 먹으며 내일 또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다행인 건 이 지하철을 타는 각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행선지가 어디인지 알지 못 하지만 사람들은 오늘도 자신들의 노선을 향해 서로를 믿으며 그렇게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홀로 외롭지는 않은 인생들이다.      



pixabay @asd14235714


이 글은 스물여섯에 썼던 글이다. 

이십 대에 썼던 글을 지금 보니 그때의 나는 생계의 무게를 지고 지하철에 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가졌었다. 어쩌면 그 또한 내 삶에 대해 느끼는 무게감을 그들에게 투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길눈이 밝지 않았다. 적어도 지하철시스템을 한 번에 간파하는 주변머리가 부족했던 건 확실하다. 병점에 도착할 때까지 상황파악 못 하고 헤맨 걸 보면 순간적인 판단력도 느렸나보다. 청춘의 의미를 모른 채 대학 이름에만 목을 매는 문화를 싫어하면서도 대학 이름과 직업 이름으로 평탄한 길을 찾으려 했던 이중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매일 순환 반복되는 무언가에 염증을 쉽게 느끼면서도 결국은 아는 데만 찾아가고 모험을 하지 않았던 건 겁이 많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나는 복잡하고 각박하고, 자꾸 내 안의 보고 싶지 않은 면만 밝혀주는 서울이라는 도시에는 살 일이 없을 줄 알았다. 


8년이 지난 지금, 나는 서울 사람이 되어있다. 살아보니 서울도 결국은 사람 사는 곳이었다. 믿고, 사랑하고, 실망시키고 결국은 자기 몫의 인생을 각자 살아내며 서로를 얄팍하게나마 이해하게 되는, 매 순간이 세상에 유일한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도시였다. 삼십 대 중반으로 오기까지 여러 도시에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은 내 인생의 종점도 바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슴푸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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