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로 12년
나는 셋째 딸의 막내로 화기애애한 가정에서 자랐고 좋은 거 싫은 거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남편이 자라온 가정환경은 과묵하고 감정 표현에 서툰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홀어머니와 아들 둘만 있는 말 그대로 조용한 가족이었다. 그렇게 성향이 다른 두 여자가 만났다.
신혼부터 아이가 4살까지 5년을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일을 하니 부딪칠 일이 많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잔소리가 없는 사람인데 아이가 태어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하지 말라는 것이 많아졌다. 아이를 두고 의견이 갈린다. 결국 5년 만에 동거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7살이 되었을 때 메이저리그급 교육회사 정규직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기쁨도 잠시 아이를 케어하면서 정시에 출퇴근하는 일은 상상하지 못할 일이라 깊은 고민에 빠졌다.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아이 케어를 시어머니께 다시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평일에만 아이를 봐주러 오시는 거니 괜찮겠지? 예전과는 다를 거라는 기대로 시작했지만 우리의 갈등은 다시 깊어져만 갔다. 물론 처음에는 대화도 하면서 엉켰던 실타래를 풀어보고자 시도를 많이 했다.
나는 책으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고 어머니는 24시간 TV을 끼고 있는 사람이다.
아이를 맡기는 며느리 입장이니 양육관이 다른 시어머니한테 "이렇게 해주세요" " 저렇게 해주세요" 라는 말씀드리기가 참 어려웠다. 아니 처음에는 표현을 했다. 10시 이후에는 수면교육으로 TV를 안 틀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수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딱! 하나의 바램이었다. 하루 이틀은 지켜지는 듯 했으나 다시 원점이 되었다. 심지어 어머니는 귀가 안 좋으셔서 옆방에서 생생하게 들릴 정도로 TV를 크게 틀어놓으신다. 우리 남편이야기로는 캐이블이 없을 떈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틀고 봐야 한다고 했다. 케이블이 밉다. 그러니 책을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말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말을 해도 안 통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사는 게 더 힘들었다. 왜냐하면 내 일상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 진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남편은 중간에서 남편 역할을 하는것이 제일 힘들다고 하소연을 한다. 어쩌면 이 고부갈등을 풀 수 있는 열쇠를 남편이 만들어 주기를 바랬던 것 같다. 그 기대를 저버린채 결국 남편도 풀지 못하고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홀시어머니와 사는 워킹맘은 고달프다. 알아도 모르는 척, 말하고 싶어도 참는 게 더 편한 게 되어버렸다.
업무 포지션이 바뀌어 출퇴근 시간이 왕복 4시간인 상황 되었다. 교통체증에 숨이 콱콱 막히는 두 달을 보내느라 나의 에너지가 다 소진된 상태였다.
그날 역시 힘겹게 집안 문을 열었다. 다른 때와 다르지 않게 고요한 분위기 였고 저녁상을 부랴부랴 차려서
아이와 남편과 셋이 먹었다. 어머니는 식사를 먼저 하셔서 우리끼리 먹으라고 하셨다.
그렇게 셋이 있는 식탁에 불쑥 나타나서는 "지금 밥이 넘어가니? 나랑 얘기 좀 하자. 한끼 안 먹는다고 큰일 이 나겠니?
갑자기 예고 없이 내린 소나기였다. 한창을 소나기가 퍼붓고 천지가 개벽할만할 천둥같은 소리를 들었다.
"당장 이혼해"
뭐가 그렇게 못마땅하셨을까? 가정을 뒤로하고 딴짓을 한 것도 아니고 정말 억울했다. 좋은 며느리,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 한마디에 균형을 맞추려 했던 모든 일들이 허사가 되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갈까? 나만 나갈까?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쓰라린 밤을 지새웠다.
그날 아침 어머니는 황급히 떠나셨다. 차라리 "일을 그만뒀으면 좋겠다. 더 이상 아이 보기가 힘들다"라고 하시지... 남편과 나는 20년을 알아왔다. 동갑이니 서로 친구같이 의지하며 의리로 살아왔다. 앞으로도 20년은 더 알콩달콩 잘 지낼 수 있는데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상상해보지도 않을 이혼이라는 말로 내 가슴을 후려 파고 가버리셨다. 코로나와 함께 그렇게 자연스럽게 거리두기를 하게 되었다.
갑자기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친정아버지가 암수술을 하신지 얼마 안 되셔서 아이를 봐달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가장 유일한 방법이 내가 육아 휴직을 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을 갑자기 내려놓고 몇 개월은 넋 나간 사람처럼 지냈다. 그래 내가 잘 사는 것이 최고의 복수일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운동하면서 나의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육아휴직을 한지도 9개월이 흘렀다.
내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아이를 혼자 두고 원거리 출퇴근이 가능할까? 버텨낼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위해 버텨내야 하지?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복직과 퇴직 사이에서 많이 고민하다 결심했다. 힘들게 얻은 정규직을 3년도 채우지 못했지만 내려놓기로... 그렇게 사표를 냈고 이틀 만에 메일이 왔다
"사직원 결재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가 될 것을 참 많이도 고민했다.
그래 길이 없으면 돌아가자
두려울 것도 없다. 배짱이 있는 내가 되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