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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an 09. 2021

두 알에 용기와
세 알에 집중력

꼬박꼬박 삼키는 8개의 알약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 기점, 용기만큼 좋은 장작은 없다. 특히 공모전 요강을 보는 순간부터 끝이 허무한 졸작을 쓰다 시간까지 날리면 어쩌냐는 걱정으로 바들바들 떠는 내게, 무작정 해보기나 하자는 대책 없는 마음가짐은 절대 사라져서 안 될 준비물이다. 그래서 나는 알약을 먹는다. 그것도 하루에 8개나 먹는다. 일주일 전에는 13개였으나, 아무리 그래도 13개는 너무 많은 것 같아 5개를 뺐다.


  도대체 뭘 그리 많이 먹냐며 놀라는 분이 있을까 미리 밝혀두자면, 실은 반 이상이 비타민이다.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루테인이나 비타민 D 같은 것. 기억력을 위한 ‘오메가 3’ 세 알과 ‘루테인’ 두 알, 햇볕을 못 쐬는 몸을 위한 ‘비타민 D’ 한 알과 불안 장애 두 알을 합쳐 도합 여덟.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짧고 굵게 살다 가자는 목표를 지닌 내게 건강 관리는 먼 얘기였는데, 따로 보상을 받거나 잔소리를 듣지 않는데도 정해진 시간마다 꼬박꼬박 약을 삼킨다.


  시작은 단순했다. 눈가를 찡그리며 모니터를 보는 내게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현대인은 모두 루테인을 먹어야 해!” 혹은 “너는 진짜 모니터 오래 보니까 루테인이라도 꼭 챙겨 먹어.”라는 얘기를 몰아 듣던 와중, 엄청난 가격으로 할인 중인 루테인을 발견했다. 루테인 하나만 사려니 왠지 루테인 옆에 놓인 ‘기억력을 높여주는 오메가 3’에도 멈칫거렸고, 스킨 조차 바르지 않는 내가 비타민을 오래 챙길 리 없으니 먹는 김에 다 먹어버리자는 일념으로 모조리 샀다.


  편안한 눈을 위한 집중 케어, 하루에 2 캡슐을 물과 함께 섭취하세요.


  뻑뻑한 눈을 깜빡거리다 인공눈물 뚜껑을 열던 도중, 가방에 구겨 담은 루테인이 떠올랐다. 속는 셈 치고 간편하게 안약을 떨어뜨리는 대신 물을 찾아 두 개의 알약을 삼켰다.


  와.


  먹은 지 5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충혈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억지로 알약 대신 안약을 주머니에 넣고 몇 시간을 일했다. 이윽고 먹은 오메가 3 덕분인지 마케팅 지식도 바로 흡수되는 기분이었다.


  는 무슨,

  비타민 찬양론을 펼치는 내게 엄마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효과 보려면 4개월은 먹어야 해.”


  그건 마치 불안 장애로 처방받은 인데놀을 일주일 먹고서 “저 이제 끊어도 될 것 같아요!”라고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던 내게 “전혀 아니에요.”라고 답하던 의사 선생님의 표정과 흡사했다. 촉촉한 눈과 맑은 집중력으로 오늘 일을 해치운 건 아무래도 얘네들(벌써 정들었다) 덕분 같은데, 말로만 듣던 플라시보 효과가 이건가 싶었지만 효과가 잘 들었건 아니건 결론은 좋았으니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용기를 고작 인데놀 두 알로, 집중력을 고작 오메가 세 알로 얻을 수 있다면 서글픈 세상, 조금은 더 힘차게 걸어 나갈 테니.


  지난주에는 하루 어치의 불안 약을 깜빡했다. 루테인과 오메가를 챙기느라 가장 중요한 약을 깜빡하다니, 이미 버스는 탔고 지금 내려 집으로 돌아가다간 지각할 게 뻔했다. ‘어떡하지?’라는 물음이 든 순간부터 심장이 쿵쾅거렸다. 눈을 감고 열을 셌다. 지금은 꿈을 꾸는 중이야. 오늘은 수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이고, 버스에 앉아 출근하는 이 상황은 그저 한낮의 꿈일 뿐이야.


  잠을 자면서 음식을 먹을 수는 없듯, 오랜만에 찾아온 숙면에 약 먹을 때를 놓친 것뿐이라 위안하니 심장이 다시 제 속도로 뛰었다. 퇴근길에는 마스크로 힘들어진 호흡 때문에 버스에서 주저앉을 뻔했지만. 결국은 쓰러지지 않고 두 발로 걸어서 도착했으니 스스로가 대견해 어쩔 줄 몰랐다. 숨을 고르는데 온 신경을 곤두세운 나머지 오늘 회사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잊어버렸대도.


  “엄마, 오메가 먹을래?”


  엄마에게 오메가를 내밀었다. 가지런한 모양으로 8개의 오메가가 옹기종기 담긴 봉지였다. 엄마는 고개를 젓고 같은 대꾸를 했다.


  “그거 가지고는 안 먹느니만 못하다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노란색 빛이 나는 오메가를 꼴깍 삼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을 영영 잊지는 못할 것 같은데. 조금 전 기억력에 좋다는 오메가를 먹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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