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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Dec 06. 2020

원대한 꿈을 꾸지 않으면
시시한 사람이 되나요?


늘 흑백논리였다.


상경 아니면 실패, 대기업 취업 아니면 실패, 시험 합격 아니면 실패, 유명인 아니면 실패.


초등학교 시절, 꿈을 발표하는 시간에서 우리는 저마다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계획만 세우면 뭐든 이뤄진다는 마시멜로 스토리가 유행하던 때였다.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친구는 환호를 받았고, 현모양처가 꿈이라는 친구는 놀림받았다. 담임 선생님조차 현모양처 외의 다른 진로를 고민해보라 했으니 속으로 같은 생각을 되뇐 게 분명하다. 고작 현모양처? 결혼이 유일한 꿈이라고?


머리 긁는 친구를 향한 비웃음 속에서 나는 어깨에 힘을 주고 피아니스트라 답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역시 내 친구!"라는 자부심과 함께 엄지를 올렸다. 그 시절의 나는 학교를 대표하는 연주자였으므로, 내 꿈은 허황되지 않으면서도 대단한 직업에 속했다. 애월읍 촌구석에서 자란 내게 롤모델은 늘 유명인이었다. 시골 소년이 UN 사무총장이 되었다는 책은 닳고 헤질 정도로 읽고 또 외웠다.



미안 열 살의 나야, 5년 뒤에도 피아니스트는 글렀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내게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실패자였다. 학원 입구에는 원장 선생님의 졸업 사진이 걸려있었는데,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사진 속 선생님은 천사처럼 하얀 원피스를 입고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기대에 부푼 미소를 띠었다.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에 지쳐 한숨 쉬는 얼굴과는 사뭇 달랐다. 대비되는 선생님을 보며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했다. 벽에 부딪히더라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육지에서 피아노를 배워놓고는 시골 초등학교 옆에 학원을 차리는 어른은 되지 않겠다고 말이다.


피아노는 일찌감치 접었으나 원대한 꿈은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이어졌다. 스물다섯에는 단독 북콘서트를 열고, 마흔에는 대학 초청 강연을 받고, 예순에는 노벨 문학상까지 휩쓰는 멋쟁이. 애월읍 촌구석에서 나고 자랐으니 끝은 창대해야 하지 않겠어?


그토록 바라고 열망하던 서울에서 6년이나 보낸 지금은 한풀 꺾였다. 을지로에 세워진 으리으리한 빌딩에서 최저 시급을 받고 인턴을 하기도 했고,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이를 만나고 부지런히 움직였건만 영재는 속속히 등장했다. 잠을 줄이고 커피를 위장에 부으며 치열하게 살아도 더 치열한 사람이 나타나더라. 인정을 받아도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널렸다. 부러움에 배가 아픈 걸 넘어서서 장이 꼬일 지경이었다. 성공한 이의 나이가 나보다 많으면 다행이었고, 어리거나 동갑이라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얜 뭔데 갑자기 나타냤나면서 툴툴대는 건 애교다.


온 세계가 나를 주목하기를 바란 탓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상실감이 들었다. 지구라는 박물관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 따로 찢어져 보관된 페이지로 살고 싶었다. 욕심이 욕심을 물고 늘어지니 하나를 이뤄도 예전처럼 기쁘지 않았다. 내 꿈은 조그만 성과에 일희일비할 정도로 작은 게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커다란 사람이니까. 먼 미래에 후손들이 내 이름을 거론하며 나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자랑하는 롤모델이 되고 싶었달까. 그러니 나를 채찍질하는 수밖에.


한땀 한땀 기운 핸드메이드 채찍질을 6년간 당하면 성장할 줄 알았지만, 결과는 더 큰 절박함을 초래했다. 일 년 간 동화 작법 수업을 듣고 합평까지 꾸준히 하면서 다시 또 입문반을 기웃댔다. 브런치에 학원을 등록했다며 증명서를 올리기도 했는데, 사실은 최근에 취소했다. 내부에서 찾아야 할 답을 외부에서 찾는 일은 그만뒀다. 코로나까지 더해지면서 지침의 정도가 성층권을 뚫기도 했다.




일주일 전에는 열과 성을 쏟아 준비한 기업에서 떨어졌는데, 탈락 메일을 보자 후련했다. 옛날 같으면 "감히 나를 떨어뜨려? 더 대단한 기업에 가서 복수할 거야!"라 으름장(어디다가?)을 놓을 내가, 이번에는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당분간 서울을 좀 떠나야겠다고.


현실에 순응한 걸까?
성공 궤도를 포기한 걸까?
꿈을 접은 걸까?


갖가지 질문이 한꺼번에 떠올랐으나 신기하게도 아니다. 원대한 꿈을 잊지는 않았으나, 꼭 이루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야 하나. 무명 생활이 길어져도 나쁘지 않다는 마음에 가깝다. 내가 글 쓴다는 걸 세상 모든 사람이 알 필요는 없지 않나. 마케터로 입사했는데 기업이 로켓을 타지 않는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지 않나. 소박한 꿈을 꾼다고, 아니 꿈이 없다고 시시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닌데. 오히려 멋대로 판단하고 규정하는 내 쪽이 시시한 사람 같았다.


큰 그릇을 품었다고 믿은 나는 사실 작은 채찍에도 멍이 드는 아이였다. 인정 받지 않으면 나를 깎아내리기 바빴고, 서른 다섯 즈음에는 서울 어딘가에 내 명의의 아파트가 있어야 한다고 재촉했다. 지난 6년의 나를 돌이켜 보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후루룩 지나가 버린듯한 느낌이다. 롤모델의 궤적을 밟으면서, 재능 있는 또래를 시기하면서 나는 참 나쁘게 치열하게도 살았다.


나라는 페이지가 스페셜 코너로 마련되지 않아도 괜찮다. 전시만을 기다리느라 오늘의 페이지가 증발된 기분이다. 후손 몇 명만 띄엄띄엄 찾아줘도 만족스럽다. 숨이 붙어있을 때 유명해지면 좋겠지만, 숨이 끊어지고 유명해져도 나쁘지 않을 듯. 철 지난 블로그 게시글에도 한 달에 한 명은 예상치 못한 경로를 타고 오니까. 세상에 시시한 사람은 없다. 원대한 야망이 있다고 누군가를 쉽게 재단하고 평가하는 사람은 싫다. 사실 그게 나였다.


서울에서의 나야 안녕,

피아니스트로서의 나야 안녕,

유명 소설가로서 나야 안녕.


그리고 오늘의 나야 안녕? 오래 기다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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