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키기 어려운 결정에서 느끼는 긍정적 감정
무심코 본 옷이 아른거렸다. 결국 할인 쿠폰을 넣어 최저가로 집업 하나를 샀다. 가슴 언저리에 적힌 상표를 가리면 이 정도 금액은 아닌 듯한데, 브랜드라 그런지 값이 좀 나갔다. 매장에서 한 차례 보고, 피팅룸에서 입어보고, 돈을 더 많이 썼다고 후회하지 않으려 인터넷 최저가로 샀다. 하지만 막상 집에 온 후드 집업을 보니 잠시 쓰였던 콩깍지가 벗겨진 건지 환불을 해야 하나 싶었다. 속으로 곰곰 고민하니 이 금액의 절반이었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았을 옷이었다. 왕복 배송비를 내고 환불할 수 있는, 그러니까 돌려버려도 되는 결정의 순간이 있어서 마음껏 고민하는 시간이 주어진 거다.
결국 나는 침을 한번 크게 삼키고 옷을 담았다… 세탁기에.
뒷짐을 지고 울세탁과 조용 안심케어를 눌렀다. 곧 '윙- 윙-'이 아닌 '우으으잉-' 하며 조심스레 돌아가는 세탁기를 편안히 바라봤다. 세탁을 했으니 환불은 할 수 없다, 입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언젠가부터 '어쩔 수 없이'라는 말은 열망을 놓는 쪽과 가까웠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자기소개를 쓰고, 권태기가 와서 홀로 열심히 노력했는데 설렘이 살아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우린 헤어지고, 가족이 바쁘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밥을 짓고,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사하고 싶지만 당장 다음 달 내야 할 월세가 없어 눈물을 삼키며 어쩔 수 없이 출근하고. 슬픔이 생길 때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저 멀리 콩콩 뛰어와 슬픔 옆에 슬쩍 달라붙었다.
여러 갈래의 길 중 한 길을 택해 걸으면, 힘들 때마다 뒤를 힐끔 보며 '그냥 다른 길을 갈 걸 그랬나' 하며 아쉬워했다. 특히 서울과 제주가 그랬다. 책에는 현재도 서울살이를 하는 중이라 적었으나, 고립감과 불안감에 막내를 만나러 제주로 내려왔다. 대개 사람들은 치유의 목적으로 섬을 방문하니 나도 자연을 보면 가빠지는 호흡이 진정될 줄 알았으나 결코 느려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은 하루에 3시간만 자니 눈과 정신은 피곤한데 몸은 거뜬한 마취 상태에 놓였다. 강요받지 않고 내 힘으로 내가 선택한 건데도 속으로 애꿎은 막내를 탓했다. 막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기 있는 거야. 나는 계속 서울에서 꿈을 펼칠 수 있었단 말이야.
물이 채워졌는지 세탁기에서 '달그라악- 달그라악-' 소리가 났다. 후드 집업이 좌우로 가볍게 흔들리는 모양이 보였다.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어쩔 수 없음이 주는 긍정적인 감정을 돌이켰다. 빨래가 끝나고 덜 말라 축 처진 후드 집업이 나오면, 이내 탁탁 털어 건조대에 올려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빨래가 마르고 후드 집업은 처음 샀던 모양과 비슷하게 돌아올 것이다. 늘어난대도 나쁘지 않다. 싱글벙글 어쩔 수 없이 입어야 하는 상황을 준 후드 집업이 고마웠다.
어쩔 수 없이 막내가 여기 있는 덕분에 느림과 느긋함의 차이를 알았다. 예전 같으면 자기가 놀러 간다고 문을 닫는 맛집을 보며, 배차 등록도 안 하고 달리느라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느림에 속이 터졌겠지만, 작년 이맘때는 3분마다 오는 지하철을 뛰어서 타던 내가 있었으니 느긋했다. 만약 지각해서 안 좋은 일이 벌어진대도 어쩔 수 있겠는가. 다니는 버스까지 손으로 조종할 만큼 전지전능하지 않은걸. 돌이킬 수 있는 기로에 놓여 선택을 하나하나 재는 감정 소모보다 나은 것 같았다.
이젠 돌이킬 수 없으니까. 밤새 고민하고 전화를 걸어 호소한대도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렇게 나는, 그때 전화를 그렇게 끊으면 안 되었다는 후회와 돈을 포기하고 치유에 매진한 결정에 대한 후회를 접었다. 시간을 돌리지 않는 이상 다시는 전화의 수신자를 만날 수 없고, 자진 퇴사를 한 곳에 돈이 없다며 전화를 걸 용기가 없다. 이미 보낸 일이다.
“한 번 선택하면 후회 말라”는 얘기는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눌러앉을 정도로 많이 들았지만, 후회 없는 나는 내가 아니었다. 택한 결정은 포기한 결정보다 못나보였고, 다른 길로 승승장구하는 평행세계의 나를 떠올리면 답답했다. 그토록 큰 결정을 뒤로하고 고작 환불할까 망설이는 후드 집업을 돌이킬 수 없게 세탁기에 넣고서야 그 말을 진심으로 알았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때로는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 후회한대도 나아지지 않을 결정을 반복하면, 억지로라도 덜 후회 않고 살 수 있겠지. 그러면서 최선의 선택이라 자위하지는 않고 싶으니 역시 인생은 해답이 없다. 어쩔 수 없는 좋은 명분을 가득 만드는 수밖에.
표지 출처 : 멜로가 체질 (JTBC,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