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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Apr 17. 2021

어쩔 수 없이 좋은 선택을

돌이키기 어려운 결정에서 느끼는 긍정적 감정


무심코  옷이 아른거렸다. 결국 할인 쿠폰을 넣어 최저가로 집업 하나를 샀다. 가슴 언저리에 적힌 상표를 가리면  정도 금액은 아닌 듯한데, 브랜드라 그런지 값이  나갔다. 매장에서  차례 보고, 피팅룸에서 입어보고, 돈을  많이 썼다고 후회하지 않으려 인터넷 최저가로 샀다. 하지만 막상 집에  후드 집업을 보니 잠시 쓰였던 콩깍지가 벗겨진 건지 환불을 해야 하나 싶었다. 속으로 곰곰 고민하니  금액의 절반이었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았을 옷이었다. 왕복 배송비를 내고 환불할  있는, 그러니까 돌려버려도 되는 결정의 순간이 있어서 마음껏 고민하는 시간이 주어진 거다.


결국 나는 침을 한번 크게 삼키고 옷을 담았다… 세탁기에.


뒷짐을 지고 울세탁과 조용 안심케어를 눌렀다. 곧 '윙- 윙-'이 아닌 '우으으잉-' 하며 조심스레 돌아가는 세탁기를 편안히 바라봤다. 세탁을 했으니 환불은 할 수 없다, 입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언젠가부터 '어쩔 수 없이'라는 말은 열망을 놓는 쪽과 가까웠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자기소개를 쓰고, 권태기가 와서 홀로 열심히 노력했는데 설렘이 살아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우린 헤어지고, 가족이 바쁘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밥을 짓고,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사하고 싶지만 당장 다음 달 내야 할 월세가 없어 눈물을 삼키며 어쩔 수 없이 출근하고. 슬픔이 생길 때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저 멀리 콩콩 뛰어와 슬픔 옆에 슬쩍 달라붙었다.


여러 갈래의 길 중 한 길을 택해 걸으면, 힘들 때마다 뒤를 힐끔 보며 '그냥 다른 길을 갈 걸 그랬나' 하며 아쉬워했다. 특히 서울과 제주가 그랬다. 책에는 현재도 서울살이를 하는 중이라 적었으나, 고립감과 불안감에 막내를 만나러 제주로 내려왔다. 대개 사람들은 치유의 목적으로 섬을 방문하니 나도 자연을 보면 가빠지는 호흡이 진정될 줄 알았으나 결코 느려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은 하루에 3시간만 자니 눈과 정신은 피곤한데 몸은 거뜬한 마취 상태에 놓였다. 강요받지 않고 내 힘으로 내가 선택한 건데도 속으로 애꿎은 막내를 탓했다. 막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기 있는 거야. 나는 계속 서울에서 꿈을 펼칠 수 있었단 말이야.




물이 채워졌는지 세탁기에서 '달그라악- 달그라악-' 소리가 났다. 후드 집업이 좌우로 가볍게 흔들리는 모양이 보였다. 여전히 뒷짐을 진 채 어쩔 수 없음이 주는 긍정적인 감정을 돌이켰다. 빨래가 끝나고 덜 말라 축 처진 후드 집업이 나오면, 이내 탁탁 털어 건조대에 올려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빨래가 마르고 후드 집업은 처음 샀던 모양과 비슷하게 돌아올 것이다. 늘어난대도 나쁘지 않다. 싱글벙글 어쩔 수 없이 입어야 하는 상황을 준 후드 집업이 고마웠다.


어쩔 수 없이 막내가 여기 있는 덕분에 느림과 느긋함의 차이를 알았다. 예전 같으면 자기가 놀러 간다고 문을 닫는 맛집을 보며, 배차 등록도 안 하고 달리느라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느림에 속이 터졌겠지만, 작년 이맘때는 3분마다 오는 지하철을 뛰어서 타던 내가 있었으니 느긋했다. 만약 지각해서 안 좋은 일이 벌어진대도 어쩔 수 있겠는가. 다니는 버스까지 손으로 조종할 만큼 전지전능하지 않은걸. 돌이킬 수 있는 기로에 놓여 선택을 하나하나 재는 감정 소모보다 나은 것 같았다.


이젠 돌이킬 수 없으니까. 밤새 고민하고 전화를 걸어 호소한대도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렇게 나는, 그때 전화를 그렇게 끊으면 안 되었다는 후회와 돈을 포기하고 치유에 매진한 결정에 대한 후회를 접었다. 시간을 돌리지 않는 이상 다시는 전화의 수신자를 만날 수 없고, 자진 퇴사를 한 곳에 돈이 없다며 전화를 걸 용기가 없다. 이미 보낸 일이다.


“한 번 선택하면 후회 말라”는 얘기는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눌러앉을 정도로 많이 들았지만, 후회 없는 나는 내가 아니었다. 택한 결정은 포기한 결정보다 못나보였고, 다른 길로 승승장구하는 평행세계의 나를 떠올리면 답답했다. 그토록 큰 결정을 뒤로하고 고작 환불할까 망설이는 후드 집업을 돌이킬 수 없게 세탁기에 넣고서야 그 말을 진심으로 알았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때로는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 후회한대도 나아지지 않을 결정을 반복하면, 억지로라도 덜 후회 않고 살 수 있겠지. 그러면서 최선의 선택이라 자위하지는 않고 싶으니 역시 인생은 해답이 없다. 어쩔 수 없는 좋은 명분을 가득 만드는 수밖에.



영구소장도 100년 뿐인 인생!



표지 출처 : 멜로가 체질 (JTBC,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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