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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May 03. 2021

무기력에 좋은 약


"선생님, 무기력에 좋은 약 뭐 없을까요." 모니터를 바라보던 선생님의 시선이 내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항우울제가……." 멋쩍은 웃음과 함께 나온 답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아녜요. 괜찮습니다." 간편하게 구할 수 있는 항우울제는 장기적으로 숙면에 좋지 않다는 얘기를 접해서였다. 아침 네 알, 저녁 다섯 알. 하루에 아홉 개의 알약을 먹으며 내일을 기다리는 건 지쳤다. 이 상황에서 항우울제까지 더하면 지금 먹는 항우울제의 용량을 조금 더 늘리는 것에서 그치리라. 약을 줄이며 무기력까지 덩달아 줄이는 방법은 현재로서 없다.


뉴스는 튼 지 오래다. 클릭 한 번이면 기다렸다는 듯 나를 옥죄는 소식이 가득해서다. 이곳에서는 누가 다쳤고, 저곳에서는 누가 사라졌다. 이곳에서는 누가 잘렸고, 저곳에서는 누가 피해를 입었다. 친구는 구인 구직 사이트마저 피한다고 말했다. 세전 180만 원을 주는 기업이 가득한 데다 그마저 직무에 맞는 일자리도 나오지 않아 답답하다는 이유였다. "그래, 지금은 버티는 시대지." 위로 비슷한 말은 전했으나,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다. 코로나가 끝나도 코로나로 인한 공백기는 코로나 이전의 공백기와 비슷한 취급을 받을 것만 같다. 다른 사람은 재택근무했는데, 요아 씨는 집에서 무얼 했나요? 가족이 다쳤다고 입사를 취소했다면, 나중에 비슷한 슬픔이 왔을 때 또 퇴사하겠네요?


라는 상상을 하다 그만두었다.

승자 없는 놀이였다.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이전에는 밝은 톤의 갈색 사진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브런치에 들어올 때마다 지금 내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하루에 몇 번이나 탈퇴하는 상상을 했다. 백 편이 넘는 글을 모두 지우고, 페이스북 페이지를 지우고, 인스타그램을 삭제하고,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그대로 세상에서 잠적. 이름을 바꾸고, (성형은 못 하겠으니 얼굴은 그대로 두고), 가족과 인연을 끊고. 설렁설렁 걸어 다니는 나날로 인생을 채우려다가 되돌리지 못할 결정을 하기까지 조금만 더 고민하자는 명목으로 미뤘다. 그러니 훗날 갑자기 브런치에 내가 없어지거든 어떤 이가 설렁설렁 세계를 돌아다니는 중이라 여겨주기를.


예전에 '더는 글을 쓰지 못하더라도, 생각보다 슬프지는 않겠지'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적 있었다. 밝은 모습의 내가 찾아올 때는 '도대체 왜 저렇게 오글거리고 우울하고 슬프고 사람들한테 위로는 주지 못할망정 위로받으려는 글을 올린 거지?' 싶었지만, 아마 댓글 창을 열어두어서 자괴감이 컸으리라.


새로 찍은 프로필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지웠다. 조금 전만 해도 기뻤는데 몇 시간이 흐르자 다시 기분이 내려앉아서였다. 하루에 몇 번씩 오르내리는 마음의 폭을 어쩌겠나. 도리가 없으니 그저 다독이며 사는 게 이롭다. 너 원하는 대로 올렸다, 지웠다, 올렸다, 지웠다 그래. 사진 정도야 괜찮지.


오늘부터 약을 대폭 줄였다. 어떤 밤을 만날지 많이 두려운데, 그만큼 설렌다. 이제 승자 있는 놀이를 할 테다.



- 요아 씨, 요즘 불안하거나 우울한 건 좀 어때요?

- 불안이랑 우울요?

- 네, 이번에 더 심해지셨다면 용량을 조금 더 늘려도 될 것 같아서요.

- 선생님, 저… 그냥 우울도, 불안도 다 가져가려고요. 약 하나로 없애거나 명상 몇 번으로 불안이 사라질 리 없다는 마음을 먹으니까 오히려 나아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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