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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Apr 11. 2021

불행을 반기는 지인을 맞닥뜨릴 때


힘든 나날인  안다. 집단 폭행이 만연하고 선천적 이유로 혐오를 남발하며, 급기야 사망까지 이르게 하는 사건의 빈도가 늘었다. 약사인 지인에게 요즘 고민은 무어냐 묻자 인공지능이 자신의 자리를 대체할까 불안하다고 했다. 언뜻 보면 여전히 흥하는 직업처럼 보이지만, 우러러보는 약사 역시 문과 끝자락에 있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최근에 책을 냈다. 괜찮음이 아닌 괜찮음에 다가가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묶었고, 이런 책을 냈으니 다시는 "네가 부러워"라거나 "넌 걱정이 없을 것 같아"라는 말에서 벗어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책을 사는 지인'과 '책을 산다더니 사지 않는 지인'을 판가름하다가,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과 '진심으로 축하하지 않는 듯한 사람'을 나눴다. 묻지 않고 홀로 속으로 나누는 모양이 옳지 않지만 마음이 이미 두 갈래로 나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불행을 반기는 지인이 몇 있었다. 처음에는 그럴 리 없다며 부정했으나 몇 년이 지나니 실체가 점점 뚜렷하게 보였다. 그들은 슬플 때 와주었고, 기쁠 때 와주지 않았다. 힘들 때면 "너도 힘들구나, 나도야"라고 말했고 기쁠 때는 "넌 힘들지 않구나, 난 여전히 힘든데"라는 마음을 보였다. 다행히 내게는 마음을 읽는 능력이 없어 나의 생각이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사람이라면 숨기기 어려운 눈빛과 태도에서 그런 마음을 읽었다. 너는 괜찮네, 너는 기뻐 보이네, 너는 좋아 보이네, 너는 성공했구나.


함께 어두운 시절을 공유하던 친구들이라 이 시기를 함께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가 도움을 구하지 않았는데 먼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처음에는 고마워하던 감정이 점점 당연함으로 변질했고 도움을 피하자 '과거와 다르게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때 배웠다. 누군가를 자발해 돕는다고 모두의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건 아니었다.


한 드라마에서, 유명할 때는 몰리던 이들이 구설수에 휘말리니 나가떨어진다는 장면이 방영됐다. 그때부터 "힘들 때 곁에 있어 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공식이 유행했다. 그러나 줄 서 먹던 가게가 폐업하고, 똑똑한 신입을 키워 일 잘하는 직장인으로 만들자는 사상이 소멸한 시대에서 절망의 공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모두가 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기쁨이 눈에 보이고 슬픔이 드문드문 놓인 사람이 많았다면, 이제는 정반대다. 슬픔이 눈에 보이니 우리는 드문드문 있는 기쁨을 파헤쳐야 한다.


처음에는 나도 그들의 아픔에 섞이기 위해 열정을 놓았다. 내가 추락하면 우리는 다시 예전의 사이로 돌아갈 수 있는 거지?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명예나 돈보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한 나는 현명한 결정이라 판단했다. 손을 내밀고 함께 성공하자 말해도 오히려 내 이미지만 추락한다면, 차라리 내가 글을 놓고 다른 직업을 선택해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 궤도에서 멀어지겠다는 마음으로. 그러나 다치는 쪽은 여전히 나였다.


어른이 되면 인간관계가 자동으로 정리된다고들 한다. 그러나 가끔은 직접 기어를 놓고 수동으로 조절해야 할 때가 있다. 불행을 반기는 친구를 지우고 둘러보니, 굳이 돕겠다며 손을 뻗지 않아도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지인이 보였다. 열망하는 궤도로 묵묵히 운전하는 내 옆에서 멀찍이 자신만의 숲을 가꾸는 사람이 띄었다.


차의 후진 기어를 뽑았다. 후진을 좋아하는 동료를 이 차에서 내려달라 부탁했다. 훨씬 가벼워진 핸들로 더 좋은 이를 가득 태울 준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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