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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Aug 17. 2021

그날의 성격

            

 집에서의 생활을 조금 더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성격 테스트 덕분에 나는 대범한 표범에서 프리지어가 되었다가 연애에서는 꽉 막힌 선비의 면모를 갖췄다는 사실을 알았다.


  클릭이라는 수고로움만 거치면 그토록 골몰하던 진로가 뚝딱 나오는 데다가, 지도를 펼치지 않고 나와 맞는 여행지를 파악함은 물론 호구와 꼰대의 자아는 얼마나 무럭무럭 컸는지 반성할 수 있어 시중에 나온 테스트는 거의 다 해봤다. 그러나 어떤 테스트든 간에 MBTI의 영향력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주변에는 혈액형이 다르다고 음료수 한 모금을 주지 않던 초등학생 때와 비슷하게 MBTI를 믿는 사람이 많다. 그중 하나가 나다.


  AB형은 모든 음료수를 거절당하는 쪽이고, 또라이라는 편견도 받아서 거의 매 순간 환영받지 못했지만 MBTI는 달랐다. ENTJ는 돈도 잘 벌고 리더십도 세고 사업가 면모가 있으며 촘촘하고 원대한 계획을 이뤄내는 성공의 아이콘이랬다. 실제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무섭지 않아 작년에는 성장담을 얘기하는 말하기 대회에 출전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무릇 계획은 미루는 즐거움을 위해 세우는 것이고, 약속은 당일 아침에 취소될수록 신난다. 대중 앞에 서서 말하는 행위는 최대한 피하고 싶고, 애정하는 사람에게 정성 어린 답장을 보내기 위해 평소에는 스마트폰을 멀리 치워야 한다. 작년의 나와 만난다면 호되게 혼나리라는 상상이 든다. 하루에 한 번은 영상 통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호흡을 가다듬고 현재의 내게 맞춰 새로 테스트를 해봤다. 그랬더니 글쎄 ISFP가 나온 게 아닌가. MBTI를 모르시는 분도 한눈에 파악할 만큼 정반대의 성격이 되어버린 거다. 친구와 연락할 때마다 진이 빠지는 이유가 어느 정도 이해됐다. 이별할 때 흔히 말하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처럼 나는 성격이 바뀌는 친구를 보면 속으로 “네가 어떻게 변하니.”라며 슬퍼했다. 상대를 배려하며 말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레 뱉던 내 친구 데려와. 친구의 성격을 바뀌게 한 주범의 멱살을(대부분 회사였다)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존이 주가 되는 상황에 닥치면 우정이라거나 사랑은 순위가 밀리는 듯했다. 당장 월세를 내야 하고 카드값을 메꿔야 하니 예전과 같은 명랑함은 점점 사라지더라. 하품을 너무 참아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친구를 몇 번 만나고 혼자 속상해 한 뒤에서야 배웠다. 그들의 현재를 존중하자고. 그때와 같으리라며 지레짐작한 뒤 실망하는 행동은 그만하자고. 나는 그대로지만 세상은 변할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내가 변한 것이다. 손바닥 뒤집듯 바뀐 성향에 때로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런 나도 나니까 싶어서 굳이 일어나 캘린더를 쓴다든지 다이어리를 빼곡하게 쓰는 힘은 내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 앞에서 나는 작년의 나로 돌아가기 위해 지닌 힘을 총동원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만난 지 두어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집이 그리웠다.


  결국 없는 약속을 지어내고 예정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한창 빠져 시간을 보낸 취미에서 지루함을 느낄 때보다 더 허무했다.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고, 왁자지껄한 모임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소개가 무색해져서 순간 나를 잃은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예상보다 더 소속에 의미를 품었던 게 틀림없다. 회사와 학교가 주는 안정감만 벗어나면 될 줄 알았더니, 이번에는 ENTJ의 일원이라는 자신감이 내재되었다. 그러니 침대에 붙은 고양이 같은 내게 이러면 안 된다는 죄책감을 선사했나 보다.






   기존과 반대되는 성격을 갖고 나니 앞으로 예측조차 불가능한 사건을 거쳐 성격이 몇 차례나 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는 몽상가였다가, 하루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 되고. 일 년은 친구를 만나지 않아도 괜찮다가, 일 년은 세계 곳곳을 다니며 친구를 만나 그들을 모두 알아가는 일에 흥겨워할지도.


  몸인 줄 알았던 고유성이 실은 코트처럼 때에 따라 입고 벗을 수 있는 존재라는 데 가끔은 나를 잃은 듯 당혹스럽겠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네가 완전히 변해버렸다는 아쉬운 소리를 들을 때도 생기겠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모두 나인 건 틀림없다. 삶의 의미를 찾지 않고서는 영영 못 배기겠다고 소리 지르다가 삶은 삶 자체만으로 소중하니 물살 가는 대로 몸을 맡기겠다고 드러누울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으리라 결심해놓고는 몇 년 뒤 다시 그 세계로 다이빙을 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취미라는 수영복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고, 힘차게 수영했다가 튜브에 몸을 싣고 무기력하게 흐르는 나도 나라고 인정하니 궁금하지 않던 미래가 조금은 기다려졌다. 왼손에는 튜브를 들고 오른발로는 파도를 내며 신기한 수영법을 만들어 낼지 모르니. 어쩌면 바다를 떠나 수영복 차림으로 산에 올라가 버려도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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