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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Dec 23. 2021

재미
없다는 취미


질의응답을 좋아한다. 언제부터 좋아했느냐 하면 학교를 졸업한 후부터다. 학점을 받으려 교수님 앞에서 억지로 꾸역꾸역 꼬리를 늘리는 질문만 받다가 처음으로 넌 뭘 좋아해, 쉬는 시간에는 주로 뭘 해, 살면서 가장 많이 본 영화는 뭐야, 라는 물음을 받으니 막상 멋스러운 답을 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이 들어 당황스럽긴 해도 기뻤다. 진심으로 우러나온 질문이라는 건 상대가 내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증거니까. 더 좋게 해석하면 당신은 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뜻으로 들렸다. 나에 대한 질문이 쌓일수록 흘러가는 생각이나 고이는 마음의 정체를 쉽게 알아차렸다. 때때로 열리는 무료 강의를 할 때도 너무 강의만 한 것 같으면 급하게 질의응답으로 바꿨다. 질문하기 어려우면 메모지에 적어달라고 했다.


강사가 매력적이어서인가…… 내가 강의를 열면 꽤 많은 분들이 참여하는데, 특히 높은 반응을 이끌어내는 시간대는 퇴근 직후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다. 출근하고 퇴근해 잠에 드는 일이 지겨워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고, 퇴근 후에도 끊이지 않는 찝찝함의 정체를 당신의 언어로 똑똑하게 짚고자 자원하는 분들이어서 질의 시간에도 글쓰기와 관련한 질문을 많이 하신다. 일기 쓰기 힘든데 어떻게 하루마다 글을 쓰나요, 독자를 신경 쓰는 글이란 어떤 글인가요, 열심히 썼는데 반응이 없으면 지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죠(그 자리에서는 신경 쓰지 말라고 답했지만 사실 저도 반응 없으면 지운답니다, 하하하하!). 라는 질문이 쌓이는데 그중 한 분이 나에 대한 궁금증을 표하셨다.


"요아님, 글 쓰는 것 말고 취미가 뭐세요?"

"……제 취미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책 읽는 거?"

"정답……."


대화가 짤막하게 끊겼다. 프리 다이빙이요, 스쿠버 다이빙이요, 패러 글라이딩이요, 클라이밍이요! 색다른 취미를 말한 뒤 환호와 함성을 듣고 싶었는데 어색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책을 읽는다는 취미가 재미없음과 동일시되어서 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통 책과 거리를 둔 분과 얘기를 나눴을 때 "정말 책 읽는 게 취미세요? 재밌어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있어 보이려고 독서, 라 꾸미는 게 아니라 진짜 내 취미는 책 읽는 거다. 한 번에 네 권 정도 읽는다. 자기 전에 읽으면 좋을 짤막한 시집이나 산문집은 침대에, 딴짓하고 싶은데 공부해야 할 것 같을 때는 트렌드나 자기 계발서를 전자책으로 찾는다. 쉬는 날이나 퇴근해서는 에세이를 읽고 조용한 카페에서는 소설을 읽는다. 물론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책 자체가 질려 영화만 주야장천 몰아본 적도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 다시 책으로 돌아온다.


최근에 엄마와 크게 싸웠다. 글만 올리면 달려와 브런치를 읽는 엄마에게 제발 읽지 좀 말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엄마가 보면 상처를 좀 받을 만한 문장이 많아서다) 자꾸 호시탐탐 들어와서 심지어는 내 글에 라이킷을 누른다. 라이킷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은 엄마의 라이킷은 백 개라도 받고 싶지 않은 나는 엄마에게 그만 소리를 질렀고 급기야 스마트폰을 뺏어 브런치를 삭제했다(이 글은 브런치팀도 보면 안 된다). 엄마는 "괜찮아, 다음 책 나오면 사서 읽을 거니까."라고 또박또박 비꼬았고 한숨을 쉬는 나를 보면서는 "왜, 다음 책에 또 가족을 팔 거야?"라는 선을 넘는 얘기를 했다. "나는 거짓말 안 적어." 낮은음을 내며 뒤를 돌았다.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은데 절대 엄마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서 손톱을 누르며 참았다.


집에 와서 엉엉 울 거야, 하고 다짐을 하는데 집에 왔더니 울음이 나지 않았다. 울 정도로 엄청 슬픈데 하도 어릴 적에 울음을 많이 참아서 눈물이 제때 나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하고 싶지는 않은데 누군가와 대화는 하고 싶었다. 앱스토어를 한참 뒤적거리다 이름 모를 사람과 무작위로 연결되어 통화하는 앱을 설치했다. 이상하게 동성과는 연결이 잘 되지 않아서 이성과 통화를 했는데, 그 사람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기 싫을뿐더러 투정해봤자 신고당할 게 빤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호호, 어떤 영화를 좋아하세요, 흐흐, 지금은 뭐 하고 계세요, 라는 마음에 없는 말만 내뱉으니 공허함이 더 크게 밀려왔다. 앱을 삭제했다(그 앱의 개발자님은 읽지 말아야 할 글이다).


아낀다고 사놓은 지 일 년 넘은 향초를 꺼내 켰다. 침대에 둔 산문집을 펼쳤다. 억지로 문장을 눈에 담으니 올라왔던 감정과 공허함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내 목소리와 사연을 들어주지 않아도 따스한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하고 싶은 말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 또박또박 읊어주는 작가를 만났을 때 외로움이 덜해진다는 사실과. 자정이 다다를 때까지 문장을 읽다 책을 덮고 잠에 들었다. 솔직하게 쓰면 너무 공허한 탓에 바로 잠에 들지 않아서 억지로 잠을 청했다. 와라, 와라, 잠아 와라, 하면 멀어지는 식이어서 나는 너무너무 편안하다, 완전 완전 아늑하다, 라고 중얼거렸다. 미니멀리스트라며 소박하게 몇 권의 책만 들고 온 게 아쉬울 만큼 책이 나를 지켜주는 느낌이었다.


책이 좋다. 케케묵은 취미로, 심심한 취미로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나는 책이 좋다. 그래서 "잠이 안 올 때는 어떻게 해요?"의 답으로 "책을 펴면 되지요!" 하고 깔깔 웃는 개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폈는데 너무 재밌어서 오히려 잠이 달아날 수 있는 것인데, 당신과 맞는 작가와 작품을 찾으면 될 일인데, 하고 말해도 그 과정까지 가기란 여러 권을 실패해야 하므로 조용히 응원만 한다. 그래서 브런치가 참 책을 가로막는 장벽을 낮춰주는 것 같아 좋다. 요즘 브런치를 그만둬야겠어요, 돈이 되지 않아요, 라는 얘기로 떠나는 분들이 많아진 걸 안다.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브런치는 글을 쓰는 독자가 있어요, 책을 사랑하는 독자가 있어요, 그분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값지고 귀한 일인데요.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아직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작가와 작품을 찾지 못했다면, 좋아하는 영화를 댓글로 써주기를 바란다. 제에……가 그 영화와 결이 맞는 책을 반드시 찾아 꼭 말씀드리겠다. 물론 실패할 수 있다. 아, 그럼 어쩌지. 당신이 책을 사랑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참 커다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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