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요아 Dec 27. 2021

다정을 뭉쳐 만든 존재


눈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데려오겠다. 나다. 눈오리를 왜 만드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소개하겠다. 나다.


귀여움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귀여움을 많이 느끼는 쪽에 가까운데, 곧 지워질 일에 진심을 쏟는 게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오리의 형상을 띈 눈오리는 기구로 쉽게 만들 수 있지만 눈사람은 장갑을 굳이 껴야 하고 힘을 들여 원형으로 눈을 뭉쳐 굴려야 해서 품이 많이 든다. 힘들여 만든 눈사람이 영상을 웃도는 기온 하나로 쉽게 녹아내리니 눈사람이고 눈오리고 다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릴 때는 나도 끙끙대며 동생과 힘을 합쳐 몸보다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었다. 다음 날 속절없이 물로 변하는 눈사람에 절망했던 것도 그 순간부터다. 회복탄력성이 눈에 띄게 낮은 나는 그 후로 눈사람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눈사람을 흘긋거리며 한숨 쉬는 어른으로 자랐다. 바라지 않는 어른의 모습이었지만 바꿀 생각도 없었다. 귀여움을 느낀다는 이유만으로 된 거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귀여운 스티커나 마스킹 테이프나 포스트잇은 붙일 수 있고 메모를 끄적일 수 있는 쓸모가 있다. 그러나 눈사람은 무언가 쓸모가 없지 않나. 기껏 다정함과 힘을 베풀어 만들었지만 이렇다 할 결과물이 없어 보인다. 굳이 얘기한다면 기념사진을 찍을 정도? 그런데 사진은 다른 사람이 만든 눈사람을 찍으면 되는 거 아닌……. 너무 비관적으로 보일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이런 내가 이른 시일 내에 눈사람을 만들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스터 샷을 맞기로 한 오늘, 눈이 가득 쌓인 제주에서 발걸음을 재촉하며 소아과에 다다랐다. 소아과는 주사를 덜 아프게 놓는다는 누군가의 말에 혹해서였다. 자지러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자 갑자기 어린이로 돌아간 것처럼 긴장감이 들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만난 의사 선생님은 인자한 미소가 매력적인 지긋한 분이셨는데, 대뜸 나를 보자마자 입을 벌리라고 하셔서 입을 벌렸다. 저번에 백신을 맞을 때는 입을 벌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더 무서워진 나는 자존심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많이 아파요?"를 시전했다. 선생님은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 없이 주사기를 꺼내셨다. 아이고, 부스터 샷은 더 아프구나, 속으로 소리를 지르며 왼쪽 팔을 걷어붙일 때 의사 선생님이 신나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하나, 둘, 셋…… 하면 놓을게요!"

그리고 선생님은 '하나'를 외칠 새 없이 주사를 넣었다 뺐다.

"엥?"

만화책처럼 엥 소리가 절로 나온 내게 의사 선생님이 손가락을 들어 올리셨다.

"하나, 둘, 셋! 끝이지요!"


당당한 선생님의 표정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소아과에서는 나를 다시 볼 일이 없을 텐데, 처음 보는 이에게 다정한 장난을 건네는 선생님의 마음에 왠지 뭉클했다. 선생님이 내게 보인 재치는 어쩌면 눈사람을 만드는 이의 심리와 비슷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이에게 재미와 귀여움을 선사하고 싶은 마음. 돌아가는 길에 마주친 눈사람이 더욱 귀여워 보였다. 시간을 내어 눈을 굴려 위태위태하게 쌓은 뒤 작은 함성을 질렀을 눈사람 창조주들이 다정해 보였다. 특히 길거리는 눈사람이 더욱 많이 부서지는 환경인데, 위험을 감수하고 기꺼이 귀여움과 다정함을 낯선 이들에게 표하는 존재들이 존경스럽고 대단했다.


처음 밝히지만 올해 친구를 동생과 같은 이유로 떠나보냈다. 평소 힘듦을 자주 토로하던 친구였다. 동생을 보냈다는 내 어려움에 취해 차마 손을 더 내밀지 못하고 떠나보낸 친구여서 더욱 죄책감에 시달렸다. 더 다정한 말을 해주면 좋았을걸, 나는 네 편이라고 말해주는 것 말고 코로나 상황에도 비행기를 타고 달려갈 걸, 그런 자책을 많이 굴린 후에는 자연스럽게 마음의 문이 닫혔다. 한 해에 애정하는 사람 둘을 연달아 잃으니 이제는 내게 사랑을 보이는 사람의 곁이라도 오래 머물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애초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지 않으면 그를 떠나보냈을 때도 무덤덤할 테니까. 죽으면 어차피 모두 끊길 인연인데 소중한 사람을 보내는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다짐이 옅어지지는 않았다. 이별은 좀처럼 익숙하지 않고 사별은 고통스럽다. 좋아하는 사람을 보낼 바에는 내가 먼저 떠나는 게 마음이 더 편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헤어져도 타격 없을 만큼의 인연을 쌓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가진다. 그런데 아직도 내 주변에는 소중한 사람이 있다. 생은 언제 다할지 몰라서 어쩌면 나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오래 살 수도 있어 여러 번의 사별을 살며 더 경험할 것이다. 그때마다 좌절하고 슬퍼할 상상을 하면 아득하다. 어른을 존경하는 이유는 이 점과 맞닿아 있다. 이 생에서는 영원한 작별이라 여겨지는 사별을 몇 번이나 겪었음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사람의 손을 붙잡는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기꺼이 눈사람을 만들고 귀여워하는 존재일 테다.


처음 보는 이에게 애정을 꾸준히 건네는 일을 무서워했다. 왜냐하면 그와 내가 인연으로 묶일 수 있으니까. 사는 내내 이별은 피할 수 없이 올 테고 나는 소중한 당신을 또 잃어야 하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 처음 보는 사이에 재치가 담긴 장난을 건네고 귀여움 어린 존재를 만든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보며 나는 애틋해한다. 멋지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멋져 보인다는 건 내가 그 면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뜻이므로, 곧 눈사람을 만들며 낯선 사람들에게 사랑을 내보여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다음 날 물로 녹아버려도 그 물은 이전에 눈사람이었던 물이다. 이제껏 물로만 흐르던 물과 하늘에서 떨어져 눈사람으로 굳은 후 녹아내린 물의 기억은 다르다. 눈사람의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업데이트!


작가의 이전글 재미 없다는 취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