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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an 27. 2022

후회 없는
결정은 없다


내가 나를 미워하는 것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할수록, 세상을 사는 사람 중 결핍 없이 완벽하게 건강한 이는 없다고 읊조릴수록 타인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대인기피증은 서서히 나아졌다. 단짝을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극심할 무렵에는 낫기만 하면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아지니 그에 따라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생겨났다. 좋은 점은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 척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만날 수 있다는 것이며 나쁜 점은 외로움을 사람으로 치유하려는 욕망이 스멀스멀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독자 분들께서 사장에게 대드는 사원의 편을 들어주신 덕분에 엊그제 소개팅을 나갔다. 아무런 정보 없이 상대를 만나는 기회였는데, 호감을 보이는 상대 앞에서 실은 전 책은 이런 내용이고 앞으로 나올 책은 이런 내용이라고 밝히기에는 부담을 주는 것 같아 감췄다. 온라인에 글을 공개한 지 어느덧 사 년이 흘렀는데 성을 뺀 이름만 치면 내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알아 이름만 밝혔다. 어차피 그의 이상형은 밝고 귀엽고 애교 많은 이랬으니 나와는 정반대라 만나도 곧 헤어지겠다는 기이한 확신이 들었다. 첫 만남에 괜찮은 인상을 받으면 진지하게 만나려는 의도도 있었으면서 굳이 그 앞에서 "저는 센 여성이 되고 싶은걸요?"라고 구시렁거린 나의 의도를 아무리 궁리해도 알 수 없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기분의 양극단을 다녀오는 동생을 십 년 가까이 돌보며 나는 저런 사람을 스스로 가족으로 영입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했다. 기분을 조절하지 못해 약을 챙겨 먹는 사람이 내가 될지는 차마 모른 어리숙한 나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에 차서 사람들이 기피하는 성향의 사람과 나라는 사람을 멀리 떼어두었다. 병을 앓고 훗날 모두가 나를 떠나리라며 완전한 마음을 내보이지 않는 버릇에 친구가 안타깝게 여겨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아, 네가 아무리 오래 아프다고 해도. 진심은 묻어 나왔으나 튕겨나갔다. 나는 동생에게 그런 다정한 말을 했다가 차갑게 번복한 사람이었으므로. 물론 만날 때마다 힘든 일을 터놓지는 않지만, 한 번 터져 나오는 아픈 얘기는 잔혹하고 지긋지긋해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도 동생에게 그만 좀 하라고 소리치던 과거의 나처럼 떠날 확률이 많다고 생각해 마음을 잠갔다.


천천히 외출 준비를 하며 속으로 상상 대결을 펼쳤다. 나라면 어떤 연인을 맞을까 하는 상상이었는데, 지난 책과 현재의 내 글과 앞으로 나올 내 책에 담길 얘기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과 내 과거와 책을 궁금해하지 않고 밝은 모습을 기대하는 좋은 사람으로의 대결. 이제까지의 나는 누가 뭐래도 후자를 고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음이 더 가는 사람이라면 나를 지배하는 울적한 면 정도야 숨길 의향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돌이켜보니 울적한 면을 매일 숨기고 좋은 면만 고르는 데 힘겨워진 나는 아픔을 알아주기를 원했고, 연인은 주저하는 내게 내 모든 아픔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해놓고서는 할머니와 엄마와 아빠와 동생과 죽음을 고민한 나의 서사에 도망치듯 이별을 고했다. 그를 탓해야 하는데 잘못된 일만 생기면 나를 탓하는 사람으로서 내 잘못이라 여겼다. 괜히 아픔을 담은 수필을 썼다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또 언제 만날까던 상대의 물음에 당신은 좋은 분이지만 내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답을 내려놓고 도망쳤다. 아픔을 이해하겠다는 다정한 말을 해놓고 예상보다 더 큰 상처에 놀란 나머지 떠나는 사람을 두 번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서는 뒷모습에 차라리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다가도 막상 그런 상황이 오면 또 나를 자책할 게 뻔하다. 그가 수용할 만한 아픔을 적절히 골라내어 내보여야 했다고. 당연히 얘기를 듣고 돌아서지 않을 수 있겠지만 한 번 생긴 트라우마가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


후회 없는 선택은 없으므로 나는 이 결정에 따라오는 작은 후회를 수용하고자 노력한다. 후회 없는 결정이 없음을 인지한 뒤 선택하는 것과, 훌륭한 선택은 반드시 있다며 후회 없이 그 결정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고른 뒤 따라오는 후회에 당황스러워하는 사람은 마음의 편안도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모든 결정에 후회가 따른다는 사실을 아는 나는 상대가 도망치지 않으리라는 좋은 가능성을 배제한 결정에 아쉬움을 느낀다. 다음 만남을 취소하는 일은 아늑한 불행 울타리에 몸을 감추는 일인지 한참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정말 마음에 드는 상대였다면 용기를 더 냈을 테니까. 어떤 결정이든 나를 덜 미워하는 쪽이 이롭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을 시작하면 많은 것을 감춘다. 왜인지 매일 샐러드를 먹고 있다 해야 할 것 같고 컵라면으로 때웠다거나 저녁에 무엇을 할 예정이냐는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서 뒹굴거리려 했다는 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다. 정작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털털한 매력을 느끼면서, 나는 자꾸 감추고 숨기고 잠그고 바꾸는 면을 보이는 데 불안한 아늑함을 느낀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사랑을 하는 중일까. 외사랑이든 양쪽으로 주고받는 사랑이든. 다소 초라하다 느끼더라도 거짓 없이 마음 편한 사랑을 하기를 소망한다. 자가와 월세와 키와 체형과 외모와 목소리를 따지는 세계에서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만나기를 희망한다.


내게도 그런 사람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만 들여다보니 이제야 알았다. 나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대신 세상에서 가장 애정하는 게 틀림없다. 조금 초라하더라도 편안한 만남을 이루기를 간절히 원한다. 언젠가는 도망치지 않고 똑똑하게 아픔을 짚을 수 있겠지. 때때로 과거로 돌아가 아픔을 쓰지 않고 행복한 척 연인과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이는 나를 상상한다. 그건 나라는 자아를 무시하고 결국 나를 잃는 선택이었을 테다. 나는 과거의 나처럼 세상에 홀로 떨어졌다는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 옆에 말없이 앉아 비슷한 결의 슬픔을 느끼며 위로를 주고받는 데서 실존 이유를 흐릿하게 느낀다.


유튜버이자 작가로 활동하시는 이연님은 자신이 얼굴을 공개하면 구독자들이 사라진다고, 그러나 나는 그렇게 떠나는 구독자님보다 남기로 결정한 구독자님에게 신경 쓰자 결심했다고 당당하게 말씀하셨다. 너무 멋진 말씀에 입을 벌렸다. 지금까지 나는 그러지 못했으므로. 누군가 구독을 취소하면 내 글이 너무 어두운 탓이라며 나를 부정했다. 즐거움을 억지로 꺼내 여기 당신이 좋아하는 기쁨이 있다고 얘기했다. 자연스러운 긍정은 당연히 따라오지 않았다. 이제 나의 구질구질한 면이 보기 싫다고 떠나시는 분들을 잡을 마음은 없다.


가족이 생을 끊으면 남은 가족도 그대로 따라간다는 자살력이라는 기괴한 용어가 있는 세상에서, 나는 내 상처가 듣기 싫다며 기겁하고 도망치는 사람을 잡아 행복한 면을 억지로 꺼낼 것이 아니라 남은 사람들과 함께 슬픔과 슬픔에서 비롯되는 작디작은 빛에 주목하며 마음을 쓰자고 다짐한다. 낮뿐인 세상은 없다. 오늘도 어김없이 저녁은 찾아오고 해는 저문다. 나는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또 찾아올 빛을 기다린다. 그거면 됐다.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아. 번복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당신과 나는 짙은 안개에서 가끔씩 희미하게 내려오는 빛과 깜깜한 새벽의 어둠에 대해 오랫동안 얘기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나온 서로의 눈웃음을 칭찬한다. 울음에 달아오른 빨간 코를 쓱쓱 문지르며 그렇게 편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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