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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an 23. 2022

상처를
파는 사장


잃을 게 없으면 무서울 것이 없다는 말을 믿어서 약점이라 여겨지는 치부를 쓰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생의 끝이라는 선택지를 진지하게 놓아두고 고민할 만큼 미련이 없으니 무엇이든 쓸 수 있었다. 하루는 아픈 가족의 이야기를 공개했고 하루는 조울증이라 불리는 제2형 양극성 장애를 앓는 모습을 내보였다. 새로운 가족이 없을뿐더러 아직은 만들 생각도 없어서 더욱이 아픈 얘기를 부끄럽지 않게 올릴 수 있었는데, 하나뿐인 연인과 사랑과 연대라는 감정을 나누고 싶은 열망이 생기자 과거를 어디까지 보여야 하는지 고민이 들었다. 이름이 특이한 편이어서 글을 쓴다고 밝히기만 하면 어떤 책을 썼고 어떤 사정이 있는지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다. 가끔은 필명으로 작가가 된 평행 우주의 나를 상상한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있노라 힘을 주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나를 내보이는 게 좋다는 결론에 이르지만.


나는 새로운 인연과 닿으면 그와의 미래를 빠르게 그리는 대비의 왕이라 마땅한 상대가 없으면서 이미 상견례까지 하는 상상을 많이 했다. 예비 배우자는 아빠를 만나는 자리에서 겉으로는 "처음 뵙겠습니다, 아버님."이라 말하지만 저분이 그분이구나, 라는 속마음을 분명히 할 테다. 나라도 내 책을 읽으면 상대의 가족을 만난다기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힌 범인이라고 지목할 테니 저절로 떠오르는 속마음을 막을 요량은 없다. 한국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는 두 사람의 결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의 커다란 가족과 다른 하나의 커다란 가족이 만나 울퉁불퉁한 면을 판판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족도 있겠지만, 왜인지 내 주변에는 갈등 없이 소풍을 가고 며느리의 편을 드는 시댁의 모습을 좀처럼 보기가 어렵다. 그 뜻은 훗날 새로운 가족이 될 사람이 차마 끊지 못해 위태롭게 이어진 내 가족을 보고 기겁해 달아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아픔을 들춰보고 자주 꺼내어 짚은 사람으로서 상대의 아픔 어린 과거에 놀라지 않고 덤덤하게 위로의 언어를 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지만, 흔들리는 감정을 투명하게 보이면 일을 못한다고 판단하는 이상한 세계의 풍습에 의문을 품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며 살아온 상대라면 내 과거에 당황할지 모른다. 할머니가 어린 너희들을 두고 농약을 들이켰다고? 글을 쓰기로 결심한 열다섯 시절부터 나의 아픔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은 만나면 안 된다는 확신을 지녀서 부러 내 글을 읽은 사람을 만났다. 소개팅을 하더라도 불과 세 번째 만남에서 우울한 성향이 짙다고 알렸고 가족과의 불화가 잦다고 했으며 애정결핍이 있으니 어떤 일이 생겨도 도망치지 않고 내 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겼다. 당연히 그들은 모두 떠났고 독자도 사랑도 잃은 지금의 나는 당연히 그런 강요 아닌 강요를 하지 않지만, 마음 깊숙이 들리는 소리에서는 그럼에도 내 과거에 놀라지 않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고여 있다. 동생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고백에 왜요? 하고 묻지 않는 사람이 연인이면 좋겠다고. 호기심을 해결하겠다며 이유를 캐묻기보다 그저 그럴 수 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기를 원한다고.


나라는 기업의 사장은 사원인 내게 자주 잔소리를 하는데, 그중 하나가 "또 아픔을 써줄 거지?"다. 언젠가 나는 슬픔을 재료 삼아서만 글을 적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오해에 빠진 적이 있다. 우울이라는 수렁에서 헤어 나오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울이 있으니 글감을 모으는 게 아닌가 싶은, 그러니 병이 나으면 더는 지금과 같은 어두우면서 밝은 글을 쓰지 못하리라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이 오래 갈수록 너무 거대하지 않은, 충분히 겪을 수 있을 만한 잔잔한 아픔이 그대로 깃들기를 바랐다. 약을 먹어도 고통이 아물지 않고 지인 중 나를 사랑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기묘한 확신에 빠질 때는 글이고 명예고 필요 없으니 낫게만 해달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잔잔한 감정으로 올라와서는 지난 울적함이 있어 또 팔 수 있는 상처가 입고되지 않았냐는 안도감이 들었다. 아픔이 많아질수록 사장은 흡족해했다. 상처가 많이 팔리면 팔릴수록 닿고 싶던 문장에 가까워졌으므로.


이년 만에 소개팅을 잡았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원은 기꺼이 자리에 나가겠다고 하지만, 상처를 팔아 돈을 버는 사장은 절대 나가서 안 된다며 지금이라도 죄송하다는 메시지를 날리고 여전한 아픔에 가만 머무르기를 바란다. 고민을 듣던 동료는 행복하면서도 글을 쓸 수 있지 않느냐는 조언을 했지만 경험상 행복할 때면 좀처럼 없는 행복을 만끽하느라 글을 뒷전으로 두는 성향을 알아서 사장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걸 안다. 어떤 글을 쓰는지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지 벌써부터 깜깜하다. 단짝조차 만나기 어려워하던 내가 대인기피증을 딛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려 약속을 잡은 자신이 기특한데 새로운 난관에 빠졌다.


상처를 파는 사장은 궁리하는 지금을 기회 삼아 절대 만나서 안 된다고 단단히 이르는 중이다. 사원은 풋풋한 사랑을 다시 느끼고 싶다며 사장을 설득한다. 두 직위에서 잠시 빠져나온 중재자인 나는 양쪽의 메시지를 오래 듣다가 한 마디를 더한다. 상점이 문을 닫을 일은 당분간 없어요. 재료는 충분하니 하루 정도는 기쁜 시간을 보내도 괜찮지 않나요. 사장은 화를 낸다. 행복은 글 쓰는 네게 독이야. 사원이 소리친다. 사장님, 독이라는 말은 너무 심하시잖아요! 당당하게 화내는 사원의 외침에 사장이 잠시 기죽은 사이 나는 슬금슬금 나갈 채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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