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요아 Feb 05. 2022

체중계의 세상 구경


  몸이 가벼워 체중계에 올랐더니 역대 최고 몸무게를 경신한 숫자가 파란 불로 깜빡였다. 뒤를 돌아 거울 앞에 서봤더니 뱃살이 생겼고 턱선이 둥글둥글했다. 프로필 사진을 찍은 지 거의 일 년 만에 십 키로 가까이 살이 붙었다. 처음에는 항불안제의 역효과로 살이 찌는 게 아닌가 싶어 선생님에게 물어봤는데 선생님은 내가 먹는 약에 살이 찌는 부작용은 없다고 했다. 다만 약의 효능으로 컨디션이 올라가 없던 식욕이 생겨서 음식이 당길 수 있다는 소견으로 남 탓하는 버릇을 한순간에 잠재웠다. 다음 주에는 춘천에서 독자님을 만나고 올여름에는 교보문고 광화문점 전시를 위해 프로필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다 망했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고,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다.


  수상이 결정되고 가장 먼저 걱정한 점은 새 원고를 쓸 수 있을까와 더불어 마지막 프로필 사진에서 찍었던 외양과 현재 내 외양의 괴리감이었다. 작년 여름 투블럭에 도전해서 이제야 막 숏컷으로 자란 머리카락은 귀에 닿아 삐쭉빼쭉거렸고 스트레스를 조절하기 어려울 때마다 얼굴을 긁는 습관 때문에 피부도 울긋불긋거렸다. 책에 작가의 외모가 무엇이 중요하냐는 입장이지만 막상 내 입장이 되자 사뭇 달랐다. 조금 더 예뻐야 할 것 같았다. 아픈 얘기를 썼으니 조금 더 수척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들었다. 더 여리여리하고 매끈해져야 할 것 같아서 일주일을 내리 굶었다. 최저 몸무게에 도달했을 때 생리 불순에 탈모에 빈혈에 부정 출혈까지 있었는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그걸 잊고 또 악순환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다이어트는 물론이고 붙임머리와 피부과를 고민했다. 첫 책의 어떤 서평에서 한 독자는 작가의 미모에 깜짝 놀라 더 집중했다는 의미의 이야기를 썼던 지라 더 외모에 얽매였다. 지금의 나는 군살 없이 탄탄한 몸은커녕 뜨겁고 짜고 매운 음식에 중독되어 고개를 숙이면 턱살이 접힌다. 운동을 하면 해결되겠지만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 않나. 하면 좋다는 걸 아는데 습관이 배지 않아 선뜻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단계를 거치는 것. 글을 쓰기 힘들 때 나는 좋아하는 책들의 문장을 그대로 따라 쓰며 손가락을 예열했듯 바로 운동을 하기는 어려우니 하루 만 보를 걷는 연습부터 했다. 그러나 아무리 움직여도 심심할 때마다 입 안에 무언가를 넣는 새로운 습관의 빈도가 압도적으로 높아서 프로필 사진을 찍을 때의 몸으로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자는 신년 목표를 떠올렸다. 나는 어떤 독자가 나의 독자이기를 바라는가. 문장보다 몸무게를 지적하고, 글의 분위기가 아니라 얼굴의 분위기를 신경 쓰며 책을 읽는 분은 독자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내가 그리고 바라는 여성의 이상향 역시 자신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밝히고 올바른 단어를 골라 선명한 목소리로 떨지 않고 발표하는 이였다. 밥을 굶었을 때의 나를 떠올리면 글자를 눈에 담을 힘이 없어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약속을 잡으면 무언가를 먹어야 하니 만남을 기피했다. 더 사랑을 받고 싶어서 외모에 신경을 쓴 것뿐인데 애초에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으니 울적했다. 칼로리를 계산하며 먹으니 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약이 식욕을 돋우니 상의 없이 멋대로 약을 끊어 살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주와 부가 완전하게 뒤바뀐 풍경이었다.


  동생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엄마는 자주 이렇게 읊조렸다. "딸을 잃었는데 살이 찌면 분명 독한 년이라고 손가락질받을 거다." 물론 엄마는 타인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죄책감으로 식음을 전폐해 이십 키로가 빠졌으나, 그 말을 한 정황으로 비추어보건대 타인의 시선이 아예 없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정작 나는 그 이야기에 그런 사람들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주변인으로 둘 필요가 있느냐고 화를 냈지만 내 입장이 되어 책을 앞에 두고 사진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대중의 악평을 상상했다. 그토록 슬프고 아프다고 해놓고서는 하나도 안 수척해 보이네, 힘들다는 건 다 거짓말 아니야, 그런 이야기를 들을까 무서웠다.


  심지어는 춘천에서 약속된 독자 분들과의 만남을 취소해야 하나 걱정했다. 거짓말을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왠지 거짓말을 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나를 찾는 독자님들은 아이돌의 팬 사인회를 간 게 아니라 작가의 팬사인회를 간 거다. 얼굴이 마음에 들어 만남을 요청한 게 아니라 책에 쓰이고 담긴 내 생각과 철학을 바탕으로 나라는 사람이 궁금해서 연락을 한 거라는 믿음을 애써 짓자 훨씬 나아졌다. 고민과 걱정이 몸을 따라 둥글둥글해지자 그제야 내가 원하는 모습의 나와 훨씬 가까워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립스틱이 지워졌는지 신경 쓰는 것보다, 앉았을 때 접히는 뱃살이 신경 쓰여 숨을 참고 이야기를 잊는 사람보다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린 분들의 이름과 생각을 더욱 기억하고 싶다.


  친구는 고민하는 내게 마음을 명료하게 만드는 조언을 더했다. "요아 네가 지금 만족하는 너의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교보문고 전시를 한다면, 십 대 친구들도 아이돌의 마른 몸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여성상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마음 한편에 놓여 채 치워지지 않는 마른 몸을 향한 욕심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첫 데이트에 설레 몇 시간에 걸쳐 꾸몄는데, 상점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에 놀라 눈물을 흘리며 당일에 약속을 취소한 과거의 나와 닮은 친구들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체 양악 수술을 하겠다며 턱을 조이게 만드는 기구를 끼고 자율 학습을 하던 나와 닮은 아이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했다.


  턱선이 뾰족하고 허리도 잘록한데 마음은 동그랗고 폭신폭신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안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외모와 성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벅차다. 그러면 한 마리의 토끼라도 잡는 수밖에. 둥글둥글한 몸과 기분으로 하루를 맞는다. 비록 이상적이라 여겨지는 몸은 아니지만, 살이 쪄도 그렇게 우울해 하지 않는 지금의 안정감 있는 내 모습이 여느 때보다 마음에 든다. 한동안 체중계는 세상 구경에 실패할 예정이다. 체중계가 못한 세상 구경은 전부 다 내가 할 테다.


작가의 이전글 이쯤 오면 됐다는 묘비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