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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Mar 16. 2022

동생이 떠난 뒤 남은 동생의 답장


  오래전 짝사랑했던 선생님에게서 칠 년 만에 전화가 왔다. 예상치 못한 청첩장을 받은 후로 어린 마음에 연락하기를 그만두었는데, 메시지 없이 긴 세월을 거쳐 걸려온 목소리에 전 연인인 줄 알고 반말을 했다. 선생님은 당황하며 당신의 이름을 밝혔고 그제야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파악한 나는 보이지 않을 곳에서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왜 전화를 걸었냐는 물음에 선생님은 그냥 전화를 걸었다고 답했고, 나는 우리가 그냥 전화를 걸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해 미련 없이 지금은 바빠 통화할 수 없다는 낮은음을 내려놓고 빠르게 차단을 했다. 선생님은 세상을 일찍 저문 동생을 만난 적 있는 사람이었다. 전화를 이어나가면 의례적으로 동생의 안부를 물어올 테고, 나는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굳이 소리 내어 또다시 이야기해야 했으므로 대화할 필요 없겠다는 결정에 힘을 실었다.


  선생님과의 통화를 끊자 이윽고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았냐는 물음이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되묻자 엄마에게서 인생의 잔인함을 대표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막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에 너를 가르친 선생님이 계시다고 하더라. 그 선생님의 동료 분이 막내 담임 선생님이라 하더라고. 막내가 가족관계에 누나 한 명을 적었다는 걸 알고 너를 가르친 선생님에게 물었대. 네 선생님은 네가 동생이 두 명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고." 아찔해진 나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동생을 잃은 사실을 알고 걱정이 되어 안부를 물으려 몇 년어치의 어색함을 깨고 전화를 건 사람에게 반말도 모자라 차단까지 했다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황급히 차단을 풀고 선생님에게 연락을 했다. 지금 전화 가능해요, 이제까지 잠적 타서 죄송하고요, 편하실 때 다시 얘기 나눠요.


  재개된 통화에서 선생님은 내게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나를 위해 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나 싶어서 덩달아 최대한 밝은 목소리를 꺼내어 응수했다. 열여덟 시절 작가를 꿈꾸던 나는 작가가 되었다고, 두 번째 책을 준비한다고, 곧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전시를 한다고 자랑했고 선생님은 신기해하며 과분한 축하를 건넸다. 깨지고 낡아빠진 속은 그대로 두고 겉만 빙빙 도는 대화가 지겨우던 참에 본론을 꺼냈다. "선생님이 전화를 건 이유는 저를 위로해주시려는 의도시죠?" 선생님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답을 했다. 침을 몇 번 삼키고 답했다. "둘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거신 거 아니세요?" 공백이 길어졌다. 선생님은 정말 몰랐다고 이야기했다. 알고 보니 가족 관계란에 막내가 누나 한 명을 적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저 동료 선생님에게서 내 이름이 나와 생각난 김에 안부 차 전화를 걸었다는 게 이유였다.


  괜한 입방정을 떨었음에 낯부끄러워진 나는 아, 그렇구나, 라고 말하고는 다시 잘 살고 있다는 겉으로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러나 한 번 깨진 분위기는 다시 붙여질지 몰랐고 선생님은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는 말씀과 함께 심심한 애도를 표했다. 나는 제주에 살고 있으니 언제 한 번 보자는 마음에 없는 이야기를 덧붙이며 통화를 끊었다. 손가락이 딱딱하게 차가워졌다. 어색한 순간이나 부끄러운 순간, 피하고 싶은 상황에 놓일 때마다 차가워지는 손가락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하얗게 굳었다. 차갑다 못해 시린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려놓고 이 글을 썼다. 키보드에 올려놓지 않으면 어른이라는 신분도 잊고 엉엉 울고야 말 것 같아서. 세상은 왜 이렇게 참혹하냐며 괜한 세상을 미워할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사랑하기 위해 머릿속 가득 엉킨 실타래를 풀고 문장으로 매듭을 지었다.


  당연히 막내에게 묻지 못할 질문이었을 테다. 누나가 두 명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한 명만 적었냐는 질문을 한다면 막내는 엄습하는 두려움과 당혹스러움에 잠시 기절을 할지도 모른다. 누나가 스스로 세상을 저물었다고 교무실에서 선생님에게 말하는 나이가 열여덟이라는 건 너무 어리다. 물론 그보다 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보다 더 어린 나이의 동생에게서 형제가 떠났음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어린 나이가 안 어린 건 아니다. 모두 다 어리다. 경찰은 동생의 장례를 준비하던 내게 여덟 살의 아이가 부모가 보는 앞에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는 소식을 전하며 나를 위로했다. 스물셋은 여덟에 비해 어린 나이가 아니라는 뜻이었을까. 같잖은 위로라고 내뱉은 말에 나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이토록 세상이 참담할 수 있나, 쓸 수 있는 감정에 한도가 있다면 모두 다 버린 기분이 들었다. 더는 내보일 감정이 없었다. 심장이 이대로 굳어버려서 상처를 받을 잔인한 일에도 상처받지 않고 쾌활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심란한 상황이 생겼다는 말에 친구가 괜찮냐는 질문을 했다. 괜찮아, 라고 쓰려다가 문장을 통째로 지운 뒤 새롭게 썼다. 괜찮은 척을 주야장천 하니까 딱딱한 사람이 되는 느낌이야. 친구는 괜찮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도 된다는 다정한 메시지를 더했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괜찮지 않음이 들켜버릴 것 같아서 나는 그 얘기를 듣고도 괜찮다고 답했다. 까맣게 탄 속을 두고 화려한 겉만 빙빙 도는 대화였다. 그 대화 역시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괜찮지 않다고, 세상은 왜 이리 참혹하고 무정하냐고 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다가 이대로 계속 억누르다가는 다정한 나를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찾기 위해 적었다. 예전 같으면 세상에 이렇게 아픈 면만 있으니 살기 싫다고 좌절했겠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나를 풀어주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아픈 날이 있으면 아프지 않은 날도 반드시 온다. 막내 대신 괴로운 답변을 한 만큼 막내는 오늘 이 사실을 아무것도 모른 채 친구들과 맛있는 점심을 먹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오늘은 닭강정이 나왔어, 조금 맵다, 알싸한 향을 맡으며 혀를 내두르는 즐거운 점심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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