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요아 Mar 21. 2022

부끄러움을 먹고 자라는 사람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는 건 부끄럽지 않지만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소개팅 상대에게 고시텔 앞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하는 건 부끄러웠다. 아빠가 나를 쥐 잡듯 때렸다고 밝히는 일은 숨기지 않았지만 헌 속옷을 입어 벗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하는 일은 창피했다. 부끄러울 때와 부끄럽지 않을 때의 차이를 구분해보니 맞거나 아픈 것처럼 어찌할 수 없게 벌어진 일은 쑥스럽지 않았고 구멍이 뚫리지 않은 속옷과 양말을 사거나 혼자 힘으로 돈을 벌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어찌할 수 있는 일처럼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감추고 싶었다는 걸 알았다.


  고시원과 옥탑방과 천장이 곰팡이로 가득한 방을 지나 제주의 원룸을 빌렸다. 집은 신기하게 전자레인지가 없고 주방이 베란다에 붙어 있었는데 어차피 나는 일 년 내내 다이어트를 할 심산이었으므로 방이 조금 더 넓다는 장점에 반해 그날 바로 계약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음식 없이 하루를 제대로 지내기 어렵고 매끼를 모두 외식비로 충당할 경우 깨지는 돈은 어마어마했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 요리를 해 먹자고 신나는 어투로 외치면 나는 근방 맛집을 데려가 호쾌하게 샀다. 지어진 지 오래된 낡은 집은 따라 주방도 깨끗하지 않았고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워서 차마 요리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마음이 아플 때마다 다 먹지 않은 음식물을 냉장고에 욱여넣는 습관을 들키고 싶지 않아 오는 친구들마다 절대 냉장고를 열어서는 안 된다고 일렀다.


  어느 친구는 연인을 만나는 삼 년 동안 방귀를 숨겼다고 했다. 방귀 소리가 남들보다 커다래서 소리를 한 번 듣는 순간 오만 정이 다 떨어질 것 같다는 이유였다. 나 역시 긴장할 때마다 배가 아파오는 사람으로서 친구의 고백에 공감을 했다. 초록불이 뜨면 신호등을 건너고 매 끼마다 밥을 챙기는 것도 번거로운데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게 진절머리 났지만 그럼에도 나는 좋아하는 사람 앞에 섰을 때 배가 슬슬 아파오는 걸 숨기고 상대를 웃기게 만들기 위해 애썼다. 한창 가난했을 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우리 동네에 온다고 했는데 밥 한 끼 사줄 돈이 없어 과제가 많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날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좋아하는 지인을 만날 밥 한 끼 사줄 돈은 꼭 만들겠다고. 이후 적성과 관계없이 여러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모인 돈은 지인을 위해 썼다.


  돈은 여유를 주기보다 나를 괴롭힐 때가 많았던 존재여서 없어지는 게 아까워 지인에게 쓰는 씀씀이만큼 정작 나 자신에게는 쓰지 못한다. 커피포트를 마련할 돈이 아까워 번거롭게 매번 냄비에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린다. 드라이클리닝을 하는 돈이 아까워 큰 마음먹고 비싸게 산 니트도 세탁기에 돌려 보풀을 만든다. 그러면 보풀 이는 니트가 부끄럽고 포트가 없는 게 부끄러워 지인에게 커피를 더 많이 산다. 부끄러움에 저마다 한도치가 있다면 나는 이미 다 채워버려서 부끄러울 게 없다고 말해놓은 사람으로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쓰다 보니 부끄러워 덮어두었던 요소가 한둘씩 늘어난다. 어떤 친구는 내가 에세이를 쓴다는 걸 잘 알아서 자신의 비밀을 에세이에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친구들의 비밀을 공공연하게 밝힌 적이 없는데 그 말 하나에 내 직업이 부끄러웠다.


  육지에 사는 친구가 3박 4일 동안 제주에 내려와 우리 집에 머물렀다. 나는 베란다에 붙은 주방이, 낡은 변기와 세면대가, 터질 듯 밀어 넣은 옷장이, 음식물 쓰레기가 만연한 냉장고가 부끄러워서 꼬박 일주일을 청소했다. 친구는 집에 실망한 기색을 보일지 모른다는 섣부른 걱정과 다르게 마지막 날 큰 신세를 지고 갔다며 언제든지 자신의 집에 놀러 오라고 이야기했다.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번듯한 호텔에 묵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던 기우와 다르게 친구는 체크아웃 걱정 없이 아늑하게 집에 머물렀다며 밥을 샀다. 괜한 걱정이었다. 서울에 올라가면 친구를 초대하기 위해 대출을 하고도 6-70만 원 되는 월세를 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작지만 취향이 또렷하게 보이는 내 집이 너무 좋다고 말하는 친구를 보며 타인을 초대하기 위해 부담을 내면서까지 완벽한 집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예산에 맞지 않는 집을 마련했는데 친구들이 저마다의 바쁜 이유로 집에 오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울적한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상대는 부탁하지 않았건만 당신을 위해 빌렸다며 생색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 얘기를 하려 했는데 빙빙 돌았다. 요즘 에세이를 쓰는 내가 조금씩 부끄러워지고 있다.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인지, 사람들이 선뜻 내주는 시간과 정성을 받을 만한 글인지, 용기와 사색을 주는 글인지 갖은 의심을 해도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 무료하다 못해 심심한 일상이 누군가에게 보탬이 될지 모르겠고 가까스로 닿은 문장이 제대로 해석될지도 모르겠다. 이불에 파묻혀 이런 생각을 끊임없이 하노라면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다. 애초에 내가 부끄러움을 먹고사는 사람이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주방이 좁고 허름하다 하더라도, 전자레인지와 커피포트가 없어도 매 끼를 든든하게 챙겨 먹고 성장할 텐데.


  코로나로 인해 급격하게 다가온 비대면 사회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사는 낡은 집이 보이는 게 두려워 배경 필터를 적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삶에 배경 필터를 적용한다. 배경이 깔끔하고 단정할수록 부끄러움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상하지, 부끄러움이 잘 감춰질수록 마음은 더욱 조급해진다.

작가의 이전글 동생이 떠난 뒤 남은 동생의 답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