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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May 02. 2022

다 망상이 아니야


   직장에서 말도  되는 요구를 너무 던지는 동시에 심심할 때마다 나를 무시해서 대판 싸우고 일어섰을 , 상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요아 님은 작가여서 그런지 가치관이 너무 올곧다고. 나는 해사하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답한  일어섰다. 자존심 싸움에서 이대로 백기를 휘날릴 수는 없었다.


  조울증을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망상이나 환청에 시달릴 수 있다는 글을 읽은 후로부터는 어떤 궂은 일이 생겨도 참고 넘겼다. 사람들의 언행이 왜곡되어 해석되는 건, 그 사람의 의도라거나 뜻 때문이 아니라 나의 망상이 영향으로 미쳤기 때문이라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미워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나를 비웃음의 구렁텅이에 넣게 하기 위해 전전긍긍할지 모른다는 의심이 드는 순간 의사와의 상의 없이 단약을 하는 버릇을 끊었다. 친구들은 나를 좋아하고 나는 있는 그대로 좋은 사람이라고 계속 중얼거리며 하루에 여섯 개의 알약을 삼켰다. 다행히 상황은 차차 좋아졌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선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교보문고에 실을 사진을 찍는 자리에서 나는 다시 예민함에 휩싸였다. 카메라 앞에 선 내게 사진작가님은 대뜸 책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두운 책이라고 답하자 무표정을 지어달라고 얘기할 때마다 책 내용을 떠올리라고 지시했다. 카메라 앞에 서서 동생의 죽음을 상기했다가 그의 말마따나 "영하게 밝은" 웃음을 차례로 짓는 것은 심장이 떨릴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사진작가라면 모든 작가들의 이름을 외우고 그들의 책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심사평을 읽고 촬영에 임했을 텐데, 그는 아무런 준비 없이 카메라 버튼만을 눌렀다. 나는 그 무던한 지시에 점점 지쳐갔고, 생기를 잃어 결국에는 표정 관리를 제대로 못한 채 촬영을 끝냈다.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는 마음에 브런치북 대상을 세 번이나 응모했다. 교보문고에 어렵사리 올라가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으로 오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결국 브런치 담당자님에게 양해를 구한 뒤 좋아하는 제주의 스튜디오를 따로 예약했다. 추가로 찍은 사진이 실리지 않대도 도전은 하고 싶었다. 책의 분위기에 맞게 덤덤하게 살아가는 표정으로 임하고 싶은 바람이 컸다. 담당자님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진작가님께는 사진이 잘 나오는 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했을 텐데, 내가 불합리한 망상으로 그를 쳐다본 탓에 스스로 그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미워하는 게 아닐지 하는 물음이 들었다. 그러나 친구는 사진작가의 입에서 나온 발화를 모두 들은 뒤에, 책의 내용에 따라 웃고 싶지 않다고 용기 내어 말했지만 웃는 게 예쁘다며 계속 웃으라고 얘기한 말을 짚으며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라고 했다. 나는 반박했다. 어쩌면 조울증으로 인한 내 망상 때문에 그의 의도를 좋지 않게 바꾸어버렸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얘기했다. 친구는 절대 아니라고 답해주었다. 무표정을 지으라고 말하면 될 텐데, 굳이 어둡다던 책의 내용을 꺼내어 떠올리라고 말한 건 그의 잘못이라고.


  내일 제주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다시 촬영을 한다. 그 사진작가님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의 친구 분으로, 브런치 프로필 사진을 찍어주신 분이기도 하다. 바꿀 수 없음은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내가 좋아하는 걸 소개하기도 벅차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을 올리는 것도 부족하다. 내가 원하는 분위기와 자세와 표정으로 다시 사진을 찍을 준비가 되었다.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는 습관은 이만하면 됐다. 조울증을 적절하게 치료하지 않으면 망상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모든 생각이 망상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내가 기분이 좋지 않았으면 기분이 좋지 않은 거다. 그 사람을 이해하려 구태여 노력하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한 번 병을 앓으면 그 병에 뒤따라오는 사실 관계를 너무 익숙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울증은 기분이 이리저리 휘날리니 내가 기분이 안 좋은 건 그 사람이 나를 신경쓰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의 경향 때문이라는 식으로. 모든 일을 남 탓 할 필요는 없지만 나의 병을 미워하면서까지, 나의 성향을 싫어하면서까지 타인을 보호할 필요는 없다. 나라면 낯선 이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병에 달린 증상을 삶에 모두 적용할 필요는 없다고. 수첩에 그의 말을 복기한 뒤 조용히 덮는다. 아무리 곱씹어도 이건 망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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