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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Apr 27. 2022

나를 좋아하지 않고서야
못 배길 만큼


동생에게 “누나, 나는 누나가 백 명은 더 있는 것 같아.”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혼잣말을 자주 한다. 백 개의 자아를 지닌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을 만큼 혼잣말을 자주 하는 사람으로서 요즘따라 혼잣말의 효력을 절실히 느낀다. 생각이 내게 거는 최초의 발화라면, 혼잣말은 입이라는 통로를 거쳐 나온 이야기로서 조금 더 정돈된 모습이다. 그렇다고 정돈된 혼잣말을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닌데, 힘을 주고 내가 내게 본격적으로 혼잣말을 한다고 마음먹으면 그것이야말로 적절하게 가공되고 포장된 문장이므로 잠시 스쳐 지나갈지언정 순간만큼은 그렇지, 그랬어, 하고 스스로 응수하게 된다.


내가 싫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감는 순간까지 나라는 존재가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살을 뺀다고 떵떵거렸으면서 맛있는 걸 찾는 내가 미웠고, 훌륭한 작품을 쓴다면서 천장만 바라본 채 눈을 깜빡이는 내가 한심했다. 모두가 바쁠 한낮 오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심각하게 보기 싫은 나머지 인터넷 쇼핑을 켰다. 갑자기 웬 인터넷 쇼핑이냐 하면, 평소에 갖고 싶은 물건을 손으로 들이면 그 물건을 지닌 내 자체의 가치가 올라가리라는 작은 기대 때문이었다. 노트북과 스마트워치를 구경하고 블루투스 스피커와 이어폰을 힐끔거리면서 내가 나를 좋아지게 할 물건이 무엇인지 궁리했다.


라이브 쇼핑으로 노트북을 가만히 구경하는데 쇼호스트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신기한 기능을 보이겠다고 떵떵거렸다. 노트북이 신기해봤자 신기할 건 또 뭐야, 하는데 쇼호스트는 기본 메모장을 열더니 음성으로 텍스트를 입력했다. 손이 아플 때마다 노트북이 대신 음성을 듣고 글을 써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는데 그게 이미 이루어진 기술이라는 사실에 경탄했다. 노트북은 이백만 원을 웃도는 금액이어서 단번에 계산하기는 어려웠는데, 이성을 차려보면 굳이 바꿀 필요도 없었다. 스마트폰 앱으로 충분히 실현하는 기술인 데다가 지금 노트북에 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였다.


“오 분 남았습니다, 단 오 분!”이라는 쇼호스트의 외침을 뒤로하고 스마트폰을 껐다. 무접점 키보드를 산 전적만 돌이켜봐도 물건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기간은 길어봐야 한 달 남짓이었다. 잘못 떨어뜨려 흠집이라도 나는 순간 전자기기의 수명은 눈에 띄게 짧아지고, 중고로 판매할 때에도 가치가 급격히 낮아진다. 단순히 손의 힘으로 좌지우지되는 물건으로 기분을 잠시나마 좋게 만들 바에야 시간은 조금 들지만 돈은 아예 들지 않는 혼잣말로 나를 좋아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내가 내게 하는 말보다 이름 모를 이가 내게 하는 칭찬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다. 나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고, 부족하지 않다고, 일을 잘한다는 듣기 좋은 말을 해도 그 말을 듣지 못해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하는 듣기 좋은 말로 여겨진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 폭식을 하고 살이 찐 내 몸을 너무 예쁘다, 너무 아름답다, 하고 소리 냈다. 기력이 없어 누워 있기만 할 때도 너무 피곤한가 보다, 아이고 더 쉬어, 하고 얘기했고 공모전에 떨어질 때도 어머, 너무 잘 썼는데, 그렇지? 다음에는 더 잘 쓰자, 하고 위로했다. 처음에는 오그라들어서 속으로만 중얼거렸는데 혀와 치아를 움직여 또렷하게 목소리를 내는 건 기분이 또 달랐다.


어떤 책에서 현대 사회에서 부자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는 시끄러워야 한다는 문장을 읽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날 찾지 않으므로 발 벗고 나서서 내가 여기 있노라고, 여기서 당신에게 도움을 줄 움직임을 기르고 있노라고 소리쳐야만 사람들이 간신히 주목한다는 뜻이었다. 가볍게 웃고 넘길 말일 수 있지만 나는 짐짓 심각해져서는 조용히 살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악플이 너무 무서워서였다. 비평과 비난을 오래 기억하는 못난 습관이 다시 발현될까 두려웠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악플은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나를 향한 악플은 성장을 위한 채찍질로 둔갑해 마구 휘두르는 중이었다. 그게 뭐야, 그래서야 어떻게 먹고살래, 사람들이 너를 좋아해 주기는 할 것 같아?


칼의 노래를 쓴 김훈 작가는 “외롭지 않으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이 작당해서 나를 욕할 때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네놈들이 나를 욕한다고 해서 내가 훼손되는 게 아니고, 니들이 나를 칭찬한다고 해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도 아닐 거다. 그러니까 니들 마음대로 해봐라. 니들에 의해서 훼손되거나 거룩해지는 일 없이 나는 나의 삶을 살겠다.” 단단하고 꼿꼿한 작가의 말을 오래 기억한다. 이윽고 타인이 내게 건넨 칭찬과 비난을 가벼이 여기려 애쓴다. 내가 믿어야 할 사람은 오로지 나다. 나를 좋아하지 않고서야 못 배길 만큼 내가 나를 칭찬한다면 나는 언젠가 거룩해질 테다. 물론 꼭 거룩해지지 않아도 좋지만, 거룩이라는 단어에 나를 잠시나마 대입할 수 있을 만큼 언젠가 거룩이 친숙한 단어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상하고 새로운 습관을 길렀다. 스스로에게  정도야 싶을 만큼   아닌 칭찬과 위로를   없이 건넨다. 음식을 먹으면 어유, 음식을 씹고 삼키고 소화하다니  장아 너무 장하다. 이러는 동시에 능력에 자신이 없으면 아구,  미래를 보러 다녀왔는데 너어무 창창하더라, 하고 웃음 짓는다. 그러면 늘어지게 자는 내가 칭찬에 힘입어 머리를   긁더니 일어선다. 바닥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고 거울을 반질반질하게 닦는다. 와아, 손에 힘이 가득해서 쓸고 닦기도 잘하네, 그렇게   외치면 스스로가  부끄럽다. 그런데 이상하지, 오늘만큼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싫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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