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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Apr 19. 2022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


수면제 기운에 취한 엄마가 비틀거리며 말했다. 나는 막내 때문에 사는 거야. 그럼 나는? 정신없느라 차마 나를 넣지 못한 건가 궁금한 내가 묻자 엄마가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너는 여동생보다 나이가 많잖아. 그게 무슨 논리인지 머리로는 알 수 없지만 마음으로는 알 수 있을 것 같던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병원에 들렀다. 주치의 선생님은 약이 어떤 효과를 보이는지 물었다. 나는 그저, 모든 게 다 엉망이라고 답했다. 상만 받으면, 책만 나오면, 사람들에게 인정만 받으면, 친구들이 우러러보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널따란 책상을 보면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욕구가 들어 본가로 향한 내게, 할 것이 없어 다시 짐을 싸고 자취방으로 가려는 내게 “그럼 누가 쎄쎄쎄라도 해줄 줄 알았어? 여긴 상갓집이야.”라고 말하는 엄마를 오래 마주 볼 자신이 없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생활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지만 일상에 가장 해를 미친다고 여기는 생각은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으리라는 망상이었다. 잘하고 있다는 말도 잘하고 있다는 얘기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대로 충분하다는 말도 충분하다는 쪽으로 해석되지 않았다. 나는 어떤 면에서든 늘 부족해 보였고 나아지기 위해서는 영혼이라도 팔아야, 심지어는 다시 태어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내가 쓴 모든 글이 지긋지긋했고 내가 하는 말을 모두 주워 담고 싶었다. 괜찮은 사람으로 가기 위해서는 모든 면을 다 지우고 새롭게 시작해야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은 인간이 될 것 같았다. 충분하지 않았으니 만족스럽지 않았고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상대의 칭찬도 고깝게 들렸다. 상대가 내게 거짓으로 칭찬을 하고 있다는 망상이 들면 걷잡을 수 없이 내가 싫어진다. 설령 진짜 칭찬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계속 칭찬을 들어야만 더 괜찮은 인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노력하게 된다.


약을 최대한으로 늘려달라는  말에 선생님이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인자하지 않았더라면  거짓 웃음을 지었을 거라고 상상했을 테니  모습에 스스로가 싫은 내가 눈을 내리깔았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약으로 모든  해결할 수는 없어요. 약은 너무 극단적으로 기분이 나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막아주는 방패막 같은 역할이고, 결국 생각의 영역은 생각을 향한 노력으로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어요.” 세상에 돈으로 해결할  없는 분야가 있다는  크나큰 상실감을 주었고 동시에 크나큰 안도감을 주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정들이 생각의 영역을 바꾸기 위해  노력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결코 쓸모없다거나 헛수고로 바뀌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걱정과 안도가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새롭게 만난 상담 선생님이 나를 싫어하는  같아 상담을 중단했다는  말에 주치의 선생님이 걱정스럽게  마디를 덧붙였다. 아무래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필요할  같아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법이 크게 유행했었다. 해석을 덧붙여 상대의 말에서 숨은 의도를 잡아내라는 얘기였다. 이야기는 연애부터 회사 생활까지 다양한 곳에 쓰였다. 겉으로 하는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말고 속뜻을 파악해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야만 눈치 빠른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처세술과 인간관계를 다룬 온갖 책을 읽으며 나는 눈치를 배웠다. 고개와 몸짓과 목소리와 분위기라는 비언어적 특징과 그 사람의 과거 기억과 상황을 대입해 그 사람이 진정 원하는 것을 알아내려고 애썼다. 연인은 그런 내게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내가 자꾸 헷갈리게 만든다고, 분명 이 식당은 가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나를 위해서 앉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을 당시에는 나름 상대를 신경 쓴 배려인데 알지 못했다고 서운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 선생님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나는 상대가 말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가장 필요한 건 약이 아니라 칭찬에 해석을 덧붙이지 않는 것 같아요, 주제넘은 말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는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사람이 싫다고 말하면 좋아하는 데 싫은 게 아니라 정말 싫은 거라고 해석할 것, 저 사람이 좋다고 얘기하면 마음에 안 드는 데 나를 위해 좋은 표시를 내는 거라고 다르게 해석하지 않고 그저 좋다고 받아들일 것, 잘했다는 칭찬은 부족한 나를 북돋아주려고 거짓말로 나를 드높이는 게 아니라 정말 잘해서 잘했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할 것. 생각의 영역에서 약의 힘에 기대지 않고 해 나가야 할 목록을 만드니 한결 후련했다. 사람들이 내 글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좋아한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것, 사람들이 내 책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내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정말 내 책이 사랑스러워서 사랑한다고 얘기했다고 믿을 것. 생각에 신뢰를 더하니 동시에 사람에게도 믿음이 생겼다. 내 앞으로 보라색 등산복을 입고 팔을 앞뒤로 휘저으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저 사람은 씩씩한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씩씩한 기분이 들어서 씩씩하게 걷는 거야, 내 마음이 씩씩하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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