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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Dec 18. 2022

어제를 찢어 오늘을 만들고


세상은 혼자고 얼마나 각별한 인연이든 간에 작별의 순간은 반드시 찾아오니 어떤 모임도 참여하지 않으리라는 지난 다짐과 다르게 나는 조금씩 작은 모임에 슬며시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각각의 모임은 연말의 인사와 더불어 작은 선물을 교환했고 그 선물은 이전처럼 쓸모없는 선물이 아닌 이만 원 남짓의 꽤 괜찮은 물품으로 정해져서 효용을 중요시하는 내게는 선물을 고르는데 예전만큼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 모임에서는 칵테일을 탈 수 있는 고창의 복분자 원액을 가져갔고 다른 모임에서는 손으로 쇠를 튕겨 소리를 내는 칼림바라는 조그만 악기를 준비했다.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사람들은 부리나케 근처 상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립밤이나 핸드크림을 챙겨왔다. 이외에도 캐릭터가 달려 있는 고속 충전기나 크리스마스트리 캔들이 속속들이 나왔는데, 나는 그 앙증맞음이 귀여워 혼자 웃었다.


분명 무작위로 받는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부분 달력을 받았다. 하루마다 날짜를 찢는 일력이나 탁상 달력, 크게는 벽에 거는 달력이었다. 대체로 양력과 음력이 쓰인 건 비슷했지만 달력마다 차이가 은근 촘촘했다. 간단한 메모를 쓸 수 있는 노트란이 적힌 달력부터 책의 구절이나 큐알 코드를 찍으면 클래식이 연주되는 영상으로 넘어가는 것까지 신년 날짜와 루틴에 꽤나 진심으로 임한 사람들의 결과물이 내 손에 쥐어졌다. 손가락을 벌려야 가까스로 쥘 수 있는 일력을 보이며 연인에게 물었다. "내가 이 만큼이나 살 수 있을까?" 잠시 아리송한 표정을 짓던 연인은 그제야 뜻을 깨닫고 단호하게 당연하다고 답했다. 매번 스마트폰 화면으로만 시간과 달력을 보다가 처음 낱장의 종이로 묶인 날짜의 두툼한 두께에 그만 아득해져 나온 물음이었다. 얕은 힘으로 일력을 훑다가 연인에게 한 마디를 더 던졌다. "내가 죽거든 이 일력을 대신 넘겨줘." 여기서 한 마디만 더 하다간 혼이라도 날 게 분명해서 그 말을 끝으로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스물의 신년부터 일기장을 사서 꼬박꼬박 기록을 남긴 덕분에 책장에는 여섯 권의 일기장이 차례로 꽂혀 있다. 그러나 작년에 가족을 떠나보내고 하루의 무용함을 깨달은 후에는 일기장을 사지 않았다. 기껏 일정을 세우고 버킷 리스트를 세워 삶을 통제하려 해도 작게는 갑작스러운 약속이 생기거나 선약이 취소되는 일정의 변경 사항이 일어나고, 크게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 일을 모두 미루고 장례식에 가야 하거나 에어컨에서 물이 흘러 일상을 멈추고 에어컨을 고치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 그러니 루틴이나 리추얼이라고 불리는 일상의 작은 약속의 힘을 깨닫기 어려웠다. 책 속 문장을 따라 쓰며 에세이로까지 번지게 하는 강의를 진행하는 사람임에도 리추얼이라는 단어가 지긋지긋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영어 공부를 하거나 미라클 모닝으로 러닝을 하는 갓생이라 불리는 삶에도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 굳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어차피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갓생으로 공부했다고 만점에 가까운 학점을 받는 것처럼 갓생으로 살았다고 만점에 가까운 죽음을 겪는 건 아니지 않나 하는 궁금증이 들면 일기를 쓰려해도 쓸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런 내가 제 돈 주고 다이어리를 샀다. 어제를 찢어 오늘을 만드는 두 권의 일력과 탁상 달력을 품는다. 신기한 일이다. 귀찮음보다 설렘이라는 감정이 먼저 든다. 오늘이 수요일인지 목요일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나는 이제 없다. 주말이라고 일력이 더 두꺼운 것도 아니어서 똑같은 두께의 일력을 넘기며 하루를 맞는다. 누구의 말마따나 우리는 모두 동일한 시간을 겪는다.


어떤 달력은 직장인을 위해 어느 날에 미리 연차를 쓰면 더욱 오래 쉴 수 있는지 월 초마다 그날을 짚어 준다. 내가 가진 달력은 그날과 관련된 책의 문구를 작은 글씨로 아래 적어두었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힘을 낸다. 설령 내일 세상을 떠나더라도 오늘 하루 잘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한다. 비판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에 머물지 않고, 사랑하는 친구에게 안부의 메시지를 미처 받지 못하더라도 일력이 지닌 다정함에 기대면 내가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고독하고 쓸쓸해도 조금은 참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뜬 채 자기 계발에 집중하는 갓생을 왜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지만, 갓을 뺀 생까지는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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