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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ul 17. 2023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


어디를 가든 말을 아끼는 편이다. 글과 달리 말은 백스페이스를 눌러 지워낼 수 없어서, 한 번 뱉어내면 다시 주워담기란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간신히 번복할 수 있어서 나는 결국 하려는 말을 삼키고 듣는 쪽을 택한다. 그렇게 소리로 만들어지지 않은 무엇들은 고스란히 속에 쌓인다. 게워내지 못해 묵히고 삼킨 말은 허물 없는 사이라고 여겨지는 누군가의 앞에서 둑이 쓰러지듯 쏟아진다. 달뜬 분위기에 힘입어 나타난, 하지 말았어야 할 말들이 쏟아진다.


이미 흘려버린 말 앞에서 나는 어찌할 바 모르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결국 모면할 말을 찾지 못해 인연과 차차 멀어진다. 그날 새벽에는 후회로 얼룩진 장면들을 복기하느라 잠을 뒤척인다. 여태껏 나는 말을 너무 적게 하거나 너무 많이 해서 누군가의 오해를 샀다. 나는 말을 너무 주저하느라 분위기를 채 풀지 못했고 위로를 제때 건네지 못했으며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을 꼬집을 용기를 영영 잃어버렸다. 또는 너무 과하게 말을 한 까닭에 미처 제자리로 돌려놓지 못한 인연들이 생겼다.


과거로 과거로, 처음 말보다 글이 편하다고 여겼을 때의 시점으로 돌아가면 그곳에는 이제 막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내가 오도카니 서 있을 것이다. 허언증을 앓아 이상을 현실로 자꾸만 데려오던 나는 친구들 앞에서 시시각각 바뀌는 거짓말로 나를 부풀렸고, 거짓 어린 말을 진실로 믿게 만들기 위해 계속해 더욱 커다란 거짓으로 말을 지어냈다. 친구들은 애초부터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눈치 챘고, 과연 그 거짓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마음으로 꼬치꼬치 질문을 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안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나서 집에 돌아와 반성문을 닮은 일기를 썼다. 시간이 흐르며 군데군데는 흐릿해졌지만, 그중에서도 또렷하게 기억에 새겨진 부분은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는 말을 스스로 제지할 수 없다면 더는 거짓을 말하지 않도록 아예 입을 열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글은 설령 거짓을 썼다 하더라도 지울 수 있었으므로.


글을 쓰며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언젠가부터 한쪽에 국어사전을 펼쳐놓고 적재적소에 맞는 단어를 고르며 문장을 이었다. 차츰 문장력이 늘고 잇따라 타자 속도가 빨라지면서부터는, 연필을 쥐고 손으로 글을 빠르게 적어 옮기는 법을 익히고부터는 글이 훨씬 편해졌다. 글은 검토나 퇴고라는 걸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글 안에서 더욱 진중해졌다.


글은 장면을 되짚는 능력이 필요했으므로 스쳐 지나간 말도 하나하나 기억할 수 있었다. 나는 친구와 다툴 때도 편지로 진심을 풀어냈고, 오 년을 만난 애인에게 이별을 고할 때에도 편지로 속내를 옮겼다. 그들은 그 사실을 지긋지긋해했다. 그때 말로 하면 될 걸, 왜 굳이 글로 써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금 그때의 기분을 떠올리며 천천히 글을 읽게 만드냐는 게 요지였을 것이다. 나는 글을 읽을 때보다 글을 쓸 때의 속도가 훨씬 오래 걸린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지만, 편지를 읽기 싫다고 돌려주는 이들 앞에서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공간에서는 편지를 주어도 내게 다시 던지는 사람이 없을 터이므로, 오히려 내가 어딘가에서 불합리한 일을 겪었을 때 함께 분노해주고 내가 어딘가에서 속상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함께 슬퍼해줄 사람이 가득하므로 나는 여기서 꾸준하게 글을 올린다. 앞으로도 쓰고 싶은 글이 많다. 직장 상사가 퇴사를 앞둔 내게 어떤 말을 했을 때 적절하게 응하지 못했던 사연과 친구를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골랐던 말이 오히려 반감을 샀던 사연과 못난 사람을 발견했을 때 많은 감정이 들어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에 관하여. 장면이 지난 후로부터 보다 성숙해진 내가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그때 그런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때 그런 말을 하면 안됐는데, 하는 이야기를 적고 싶다.


나는 기억을 안고 집에 돌아와 모니터 앞에서 옮겨 적는다. 그때 흘려야 했던 눈물을 흘리고 그때 지어야 했던 웃음을 뒤늦게 짓는다. 글은 스스로의 반성문에만 그치지 않고 멀리멀리 날아간다. 더욱 멀리 멀리 날아가 비슷한 일을 겪은 누군가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훗날의 내게도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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