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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S Jan 25. 2016

장석주, 박연준 부부가 되다

회사에 쌓여있던 과월호 top class를 들춰보다가,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장석주 평론가가 박연준 시인의 시를 해설한 것.


얼마 전에 두 분이 혼인신고를 올렸다 들었는데, 그 스토리가 궁금했다. 검색만 하면 다 나오는 시대라 인터넷 서핑을 통해 대략의 러브스토리를 알게 되었고,

이들이 결혼식 대신에 발간한 책이 궁금해졌다.





중앙일보를 구독하지는 않지만

이들의 부부됨을 설명한 신문사별 기사 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 기사를 가져왔다.


스물다섯이라는 어감은

참으로 톡톡하니 혀끝에 맴돈다.

우리 엄마와 나의 나이차이라고 하면

너무 현실적이어 보이지?


그럼에도 둘의 모습은 아름다워,

외모가 나이든다고

마음이 신선하지 않은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어 기쁘다.


찬찬하고 반짝이는, 과즙 풍부한.


http://news.joins.com/article/19311712

<박연준 서문>

자, 모자여, 외투여,
두 주먹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나가자.
자, 길을 떠나자!
자, 가자!
―프레데리크 그로,『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우리는 ‘새벽의 나무 둘’처럼

“네 이름을 발음하는 내 입술에 몇 개의 별들이 얼음처럼 부서진다.”

오래전 이렇게 시작하는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첫 문장을 지금까지 외우고 있네요.
설렘과 두려움 속에서 당신 입술 위 내 이름을,
부서지는 몇 개의 별들을 상상해보았습니다.

먼 곳에서 나를 향해, 별들이 걸어오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저녁이 되자 슬퍼졌습니다.
무릎을 꿇고 ‘얼음을 주세요’란 제목으로 시를 썼지요.
그 시로 시인이 될 줄은 몰랐지만 시를 쓰던 순간,
파랗게 내가 곤두선 불꽃이 된 기분이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자기감정을 아는 것,
사랑은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지금 나는 순해졌습니다.
지독함이 스스로 옷을 벗을 때까지,
사랑했거든요.

우리는 새벽의 나무 둘처럼
행복합니다.
잉걸불 속으로 걸어가는 한 쌍의 단도처럼
용감합니다.

그때 별들이 왜 하필 이쪽으로 걸어왔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이 책은 우리의 결혼 선언을 대신할 것입니다.
각자의 글이 빵과 소스 같기를,
그렇게 어우러져 읽히기를 바랍니다.

책의 처음과 끝에 김민정 시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드니에서 만났던 분들,
어머니와 남동생 태준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나보다 먼저 생각하게 되는 사람,
나의 JJ에게도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천천히 오래 걸어요, 우리!

2015년 12월, 서교동에서
박연준


<장석주 서문>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다비드 르 브로통,『걷기예찬』

‘1인분의 고독’에서 ‘2인분의 고독’으로

1인분의 고독
당신이 보인 뜻밖의 사적인 관심은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관례적 방식을 빌리기는 했지만, 당신의 ‘사랑한다’는 고백에 놀랐어요. 그리고 기뻤습니다.

잎을 가득 피워낸 종려나무, 바다에 내리는 비, 그리고 당신. 그것은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의 목록이에요. 기름진 경작지 같은 당신의 황금빛 몸, 물방울처럼 눈부시게 튕겨오르는 당신의 젊은 사유, 서늘한 눈빛을 상상만 해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사랑이라니! 와디를 아시는지요. 사막의 강, 우기 때 물이 흐른 흔적만 남아 있는 메마른 강. 난 그런 와디나 다름없어요. 누구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인색하고 협량한 마음의 와디. 당신이 흐르는 강물이 되어 이 협량한 마음의 와디를 가득 채우고 흐르길 오랫동안 꿈꾸었지요. 당신의 강물로 내 죽은 뿌리를 적시고, 마침내 잎과 꽃을 피워내고 열매 맺기를 꿈꾸었지요.

아아, 하지만 나는 그걸 흔쾌히 수락할 수 없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과실을 깨물어 그 넘치는 과즙의 열락을 맛보고 싶은 욕망이 없는 건 아니에요. 몇 날 며칠의 괴로운 숙고 끝에 당신의 사랑을 거절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부디 거절의 말에 상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미 낡은 시대의 사람이고, 그러니 당신이 몰고 오는 저 야생의수목이 뿜어내는 신선한 산소를 듬뿍 머금은 공기에 놀라 폐가 형편없이 쪼그라들지도 모르죠. 그러니 나를 가만 놔두세요.

더 정직하게 말하죠. 나는 오랫동안 혼자 잠들고, 혼자 잠 깨고, 혼자 걸어다니는 저 1인분의 고독에 내 피가 길들여졌다는 것이죠. 나는 어둠 속에서 1인분의 비밀과 1인분의 침묵으로 내 사유를 살찌워왔어요.

고갈과 메마름은 이미 생의 충분조건이죠. 난 사막의 모래에 묻혀 일체의 수분을 빼앗긴 채 말라가는 전갈이죠. 내 물병자리의 생은 이제 1인분의 고독과 1인분의 평화, 1인분의 자유를 나의 자연으로 받아들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거기에 서 있으면 됩니다.

어느 해 여름 우리는 바닷가에서 쏟아지는 유성우를 함께 바라봤지요. 그때 당신과 나의 거리,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그 거리를 유지한 채 남은 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2인분의 고독
‘1인분의 고독’에 웅크려 있던 내 내면을 들여다보니,
거기 두려움이란 짐승이 불안한 눈동자를 하고 숨어 있더군요.
짐승의 눈에 겁이 잔뜩 들어 있어 가엾었어요.
‘1인분의 고독’을, 그 자유와 고요를 잃을까봐 두려웠던 것이지요.
이제 망설임을 떨치고 용기를 냅니다. 사랑이라고 해도 좋아요.
어떤 사이프러스 나무도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래서 ‘2인분의 고독’을 덥썩 받아 품습니다.
사랑이란‘ 2인분의 고독’을 뜨겁게, 늠름하게 받는 거예요.
생의 찬란한 순간들을 함께할 사랑하는 P와
이 멋진 책을 결혼 선물로 만들어준 김민정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2015년 12월, 서교동에서
장석주


마지막으로 2004년 박연준 시인의 등단작 전문이다.

얼음을 주세요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 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DA 300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 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출처: 중앙일보] 25세 나이차 극복한 문인 부부… 감동의 공동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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