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현대무용단의 예기치 않은 무엇
9/3 토요일.
MMCA와 KNCDC의 야심찬 콜라보를 보려고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다.
오늘의 공연은 4개. 이 중 3개를 보겠다.
먼저, 옥정호 퍼포먼스.
공연캘린더에는 '훌륭한 정신'이라고 되어있었으나 퍼포먼스 안내에는 '<6470/1hr>'이라고 되어있어 관객을 아리송하게 하는 퍼포먼스의 일부인가 생각을 해보았다.
멀티프로젝트홀.
안내하시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쳐서 씨익 웃었더니 그 분도 씨익 웃어주셔서 기분이 좋아졌다.
인상이 좋지는 않은 풍채있으신 분과, 실버서퍼같은 분이 등장.
저 양복입은 퍼포머 분께 동물농장의 나폴레옹같은 인상이 들었던 것은 삼보일배를 하는 수동자의 속도를 높여 동작의 수행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는 점에서이다. 실버서퍼의 수행을 하기 어렵게 만들며 그렇게 하는 당위성을 알 수 없지만 순응하게 만드는 단호한 몸짓에서 특히 더.
외형적으로 가지런히 양복을 입고 우뚝 서있었다는 면에서 자신감과 권위가 느껴졌다. 또한 우리나라 고전적으로 나쁜 놈이 주로 신체적인 면의 풍채가 좋았다는 점에서 외형적으로 놀부같아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양복입은 퍼포머의 수행에 관련하여 권위적인 표정과 부연 설명없는 가속은 요새 사회에서의 갑질, 점점 어지럽고 혼돈스러워지는 엔트로피, 흔히 말하는 수저들의 불공정한 시작 등을 예표하는 듯 했다.
햄스터를 키운 사람은 알 것이다. 챗바퀴에 처음 탄 햄스터는 정신없이 뛴다. 점점 속도가 빨라진다. 아마 햄스터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실버서퍼는 삼보일배를 한다. 우둔하리만치 어떻게든 법칙을 수행해내려고 한다. 끊임없는 챗바퀴를 돌면서 왜 돌아야 하는지, 속도를 올리는 당신은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러닝머신의 속도는 올라가고, 실버서퍼에게 삼보일배의 수행은 그에 비례하여 어려워진다.
실버서퍼는 '왜'냐고 묻지 않는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 트레드밀 위의 수행은 계속된다. 버겁지만 이겨내야지. 그래야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겠니? 누군가에게는 희극, 누군가에게는 비극.
모두에게 훌륭한 정신!
김수자 전에서 빚은 찰흙.
국립현대무용던 퍼포먼스 아니고서도 관람할 것들이 많다. 족저근막염 환자라 오래는 못 걸어다니느라 전시관을 전부 둘러보지 못했다. 일인당 4,000원 정도로 관람료도 몹시 저렴하기에 다시 또 방문해도 비용적으로 부담스럽지는 않겠다.
조형준의 오버더월.
지난 북서울에서 공연하셨을 때 상당히 괜찮았다고 들어서 상당히 기대하고 갔다.
음악 표현 중 하나로 헤미올라라는 게 있다. 사전적으로는 두 마디를 셋으로 나눈 리듬이라고 정의되는데,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다른 리듬을 연주하나 서로 조화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현대무용에서도 각자 다른 것을 수행하지만 실은 헤미올라인 것처럼 느낄 때가 있는데, 오늘의 공연은 전혀 별개의 것들을 한 군데에 구현했다. 너무나도 실험적이다보니 각 퍼포머들의 수행 관계가 모호해져버렸다.
보드-아이스크림-양말-드레스들-한쪽면만 거울지를 붙인 스퀘어 스티로폼-콜라 등의 소품이 등장하고, 사람들과 사람들을 헤치고 퍼포머들이 등장하는데 끈질기게 그러한 포맷을 고집하며 관중들에게 어떠한 불편을 감수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오늘 공연은 토요 문화생활을 목적으로 미술관에 방문한 아이들이 있었다. 공연 말미엔 퍼포머들이 아이들로 하여금 콜라병을 들고 달리도록 독려하였다. 아이들도 참여할 수 있는 공연이라면 전체관람가를 전제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공연장소 중 스티로폼을 쌓아놓은 공간 내부엔 외설적인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은 일반적으로 '야하다'고 하는 그림보다 더욱 하드코어한 이미지들이었다.
보편적 대중을 위한 현대미술관과 국립현대무용단의 방향성과 일치하는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공연임을 가정하였을 경우 그들 중 (진짜) 공연의 대상은 누구인가? 같은 동류들-퍼포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가. 그렇담 이 국립단체들의 행사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세간의 화제가 되는 것이 목적인가?
이 생각은 안데스의 공연을 보지 못하게 된 부분에서 공고히 되었다. 17시의 안데스 공연을 보려고 갔더니 입장 시간이 늦었다며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시간을 엄수해야 한다는 사전공지도 없었으며, 어떠한 안내문도 부착되어 있지 않았다.
이전 옥정호, 조형준 공연에서는 공연 시간 전 공연장에 도착했으나 공연들은 언제 도착하든 시간이 중요치 않았다. 안데스의 공연은 도착시간이 중요했다. 앞의 두 공연으로 시간이 중요치 않다는 일종의 사회적 학습화가 된 상태에서 갑작스레 정시에 맞춰오라는 요구는 관람객 입장으로서는 당혹스럽다. 그렇다면 사전 공지가 되었어야 맞다. 그래도 늦으면 관람객의 책임인 것이다. 안내원은 짜증섞인 말투로 늦은 건 우리들이니 3시간을 기다리라고 했다.
친구 T는 순수하게 안데스 공연을 보려고 미술관 입장권을 끊었다. 영화관만 해도 못 들어가시게 해서 죄송하다는 사과라도 할 텐데, 저렴한 입장권으로 들어왔으면 이 정도로 고마워하라는 무의식적 압력인가, 국립단체의 자존심의 발로인가 안내원은 끝까지 고압적인 자세로 20시 공연을 보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혹시라도 우리가 들어가는지 감시했다.
즐겁게 기대하며 갔다 불쾌해진 날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우리는 20시 공연을 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