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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야 Nov 20. 2019

기억의 서문.

이민생활 7년간의 기억을 마주하기.

 어렵사리 얻어낸 2주 휴가의 마지막 날, 달떴던 마음을 차분히 하고 앉는다. 어느덧 7년 차에 접어든 호주에서 삶은 누구 하나 쫒아오는 사람 없이 나 혼자 그렇게 분주했다. 중간중간 여행도 하고 나름 여유를 잃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나 보니 요 근래 몇 년은 여러 일들에 시달려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거 같다. 스스로도 의식하고 있지 못했던 탈진이었음을 2 주간의 휴식을 통해 깨달았다.  

 오랜만에 여행다운 여행도 하느라 절반의 휴가를 보내고, 남은 절반은 집에서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낮잠도 자면서 그렇게 한가한 시간을 지냈다. 그러다 문득 이제는 내 안에 쌓여있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내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7년이라는 시간을 낯선 호주 땅에서 살아내며 가슴속에 응어리진 기억들, 헝클어진 채로 내버려 두었던 그것을 이제 다시금 마주할 수 있는 때가 된 것 같았다.


 호주엔 자카란다가 봄이 되었음을 알린다. 분홍 빛 희끗한 벚꽃과 달리 새파란 꽃을 피우는 이 시기가 한국과 계절이 반대인 호주의 봄이다. 갈수록 짧아지는 봄, 가을의 자취는 이곳 남반구의 땅도 다르지 않다. 두툼한 겉옷을 벗을 새도 없이 반팔 옷을 꺼내 입어야 하는 날씨에 자카란다도 시기를 놓친 듯 예년만큼이나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내지 못한 듯싶다.

 그래도 올 해엔 호주에 건너온 이후 처음으로 자카란다 꽃놀이를 다녀왔다. 한국에 살 때엔 연례행사마냥 찾던 벚꽃길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는 그런 작은 여유를 갖는 것조차 쉽지 않았나 싶다. 이제야 조금씩 눈에 익어서 마음으로 보게 되는 호주의 풍경들이 늘 그리운 모국의 정취를 서서히 대신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안으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한국에서도 서서히 셰어하우스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이 곳 호주에서는 특히 이민자인 우리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하다 싶은 삶의 모습이다. 우리 집도 그런 집들 중 하나라서 이제껏 꽤 많은 친구들이 우리와 함께 지내다가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갔다. 오늘도 마침 두 달여간 같이 한 식구로 지냈던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짧은 배웅을 하고 들어왔다.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매년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들이 워킹홀리데이로, 혹은 나처럼 새로운 삶을 찾아서 호주를 찾는다. 각자의 사정을 가슴에 품고 찾아온 기댈 곳 없는 이민자의 나라에서 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 한켠을 내주기도 하고 섣불리 내준 마음 때문에 때로는 상처를 받기도 하는 삶은 세상 곳곳에서 낯선 땅을 찾은 한인들 모두가 공감할 만한 일이 아닐까. 어느 곳에서 살고 있던 결국엔 사람이 전부인 듯싶은데 호주라는 곳은 거기에 규모부터가 남다른 광활한 자연환경이 어우러져 또 다른 기억들을 빚어내고 있다.

 

 이렇게 사람과 자연이 뒤섞여 뭉텅뭉텅 덩어리진 기억들이 내 안에 가득 차 있다. 일 벌이기는 좋아하지만 뒷정리 마무리는 익숙하지 못한 내 성격처럼 내 안의 내면이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살았나 싶다. 그렇게 그냥 그대로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하나씩 정리해보려고 한다. 나에게 익숙했던 글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순서는 뒤죽박죽이겠지만 매일 달려가는 삶에서 하나씩 그 파편들을 모아다가 하나의 완성된 기억을 만들어 어딘가에 정리해 두면 추억하기도 쉽고 혹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우리 삶이 누군가를 그대로 쫒아가는 길은 아닐 테지만 그 중간중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있다. 결국 수많은 고민 속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나 자신이겠지만 그 과정 가운데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이나, 누군가가 앞서 그 길을 걸었던 흔적이 있다면 그 결정의 시간이 조금은 단축되었거나 실패로 이르는 결정들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들이 있었다. 비슷한 삶을 공유하는 한국에서가 아니라 이민자로서 때로는 언어조차 장애가 되는 남의 땅에서 살아가는 처지에 이런 도움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내 실수들 혹은 결정들을 되짚어 보면서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들이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길들을 바로 정할 수 있을 테고 다른 이들에게는 내가 바랬던 그 작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내가 마주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스스로와 대면하게 될 그 시간들. 때로는 고통이었고 때로는 희망이었던 그 기억들을 하나씩 반추하며 적절히 소화를 시켜내면 나를 더욱 뻗어가게 만들 자양분이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이렇게 앞으로 기록해 나갈 내 기억들의 서문을 빼꼼히 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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