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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나야 Nov 27. 2019

호주로 이민을 간다고??

1. 왜 호주여야 했을까?


 한국인들에게 호주는 생소한 나라다. 그나마 알려진 것이라고는 미국산 소고기의 대체제인 호주산 소고기와 젊은 청년층에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기 가장 쉬운 나라라는 정도? 그리고 캥거루와 코알라쯤 알고 나면 호주에 대한 정보는 바닥이 나곤 한다. 나름 밀고 있는 청정국가의 이미지는 이웃나라 뉴질랜드에게 밀리고, 매력적인 여행지로 유구한 역사의 유럽이나 가성비의 동남아 국가들에 밀려 한국인에겐 만년 후순위의 존재인 나라 호주. 하지만 나에게 호주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익숙했던 나라였고 꼭 방문해야 할 최우선순위의 나라였다.
 
 ‘Hillsong church’
 지금은 불가지론자가 되었지만 그 시절의 나는 꽤나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학생이었다. 유년시절부터 독립적으로 자라나긴 했지만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독립을 하게 되어 혼자 삶을 꾸려가면서 교회라는 공동체는 나에게 부족했던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대신해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 시절 예배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어느 날 내가 알고 있던 한국의 예배곡들은 대부분 외국의 곡을 번안한 것들이란 사실을 알고 난 뒤 원곡들을 찾아보니 이미 당시에도 아는 사람들에 겐 유명했던 ‘Hillsong church’의 존재를 알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현대음악에 비하면 유행이 한 참 지난 느낌의 교회음악들이 그 당시 대부분이었다. 현대음악의 악기들을 똑같이 가져다 쓰면서 어쩌면 그렇게 시대에 뒤쳐진 음악들을 공유하는지가 불만이었던 내게 그곳의 음악들은 당대 음악들과 비교해도 전혀 다를 바가 없었고 심지어 또 다른 영역의 교회음악의 문화를 창조해내고 이끌어가고 있었다. 나도 그 문화에 빠져들었고 막연하게나마 그 교회에 직접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방법을 찾다가 당시엔 흔하지 않았던 워킹홀리데이라는 제도도 알게 되어 이를 이용한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던 적이 있을 정도로 호주는 내게 소고기나 캥거루의 나라가 아닌 전 세계 교회음악을 선도하는 나라였다.

 그 꿈을 여전히 가슴에 품은 채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원래 계획은 전역 후 무조건 호주로 떠나는 것이었지만 3년간의 군 생활은 내 계획에 변화를 주기에 충분하리만치 혹독했다. 탈진상태로 전역을 하고 깊은 고민 끝에 호주가 아닌 스스로를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스위스로 반 년 간의 여정을 떠났다. 처음 접하는 선진 유럽의 문화와 자연환경은 나를 놀라게 했고 무엇보다 이제껏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그 흔히 말하는 ‘여유’라는 것이 사치가 아닌 당연한 일상이라는 사회 분위기가 해외생활에 대한 내 가치관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어찌어찌 우여곡절 많았던 6개월간의 유럽 생활을 마치고 정작 한국에 돌아오고 나니 너무나 상반된 분위기에 갈 길을 잃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막연하게 스위스 일정으로 미뤄진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신선놀음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주변 지인들과 이런 계획들을 이야기하던 중 뉴질랜드에서 생활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녀석에게서 호주 대신 뉴질랜드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아무리 내가 독립적인 성향이긴 하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호주에 비해 이미 그곳에서 몇 년간 지내온 친구 한 명이라도 있는 뉴질랜드라는 조건이 무시할 수 없는 조건 이기에 다시금 호주는 뒷전이 되고 대신 뉴질랜드 워홀 비자를 발급받고 남반구로 향했다.


 호주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사회/경제 분야에서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나라 뉴질랜드. 그곳에서 약 10개월 남짓한 워홀 생활을 하는 동안 그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이 가진 어마어마한 인맥을 통해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만나고 함께 어울리며 생활하는 동안 내 인생에서 최고로 정신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유럽에서 느꼈던 여유를 다시금 만끽할 수 있었던 사회적 구조, 다양한 국적을 가진 청년들이 모여 엄청난 잠재력을 뿜어내고 있는 것에 나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고 애당초 계획에도 없던 해외 이민을 처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민에도 다양한 방법들이 있었고 영주권을 취득하기 위한 조건들을 채울 수 있는 경로를 알아보며 막연한 꿈을 꾸고 있던 도중에 지금은 아내가 된 당시 여자 친구가 요리를 공부해 보지 않겠냐는 솔깃한 제안을 한다. 당시 워홀 생활 중에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수단 중 하나가 음식이었고 어려서부터 혼자 자라느라 웬만한 요리들은 제법 맛을 낼 수 있었기에 나는 요리를 즐기며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눈여겨본 여자 친구가 아예 직업을 삼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넌지시 꺼낸 것이었다.

 별다른 기술 없이 평범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진로를 정하는 데 있어서는 어려움이 많았다. 원래는 예배음악만을 생각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말 그대로 현실은 생각하지 못한 계획이었음을 슬슬 자각하고 있었고 딱히 어느 하나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성격에 늘 주저하기만 했던 차에 요리를 전업으로 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끌릴만했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사람들이 내 요리를 먹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나에게 늘 신선한 자극이자 피로회복제였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같이 사는 식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요리를 하는 나를 보며 친구들은 혀를 내둘렀다. 당시 내게 유일했던 즐거움을 직업으로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던 마음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주권이라는 현실적인 장벽을 넘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즐기지 못하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거지 같은 성격을 스스로 돌아보며 나는 요리를 공부하는 것에 진지한 결정을 내리고 정보를 모으던 중에 당시 뉴질랜드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내가 생각했던 유학 후 이민이라는 길이 막히게 된다. 나에겐 그저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했기에 크게 낙담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나를 통해서 호주라는 곳에 대해 미리 조사를 하고 있던 지금의 아내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어렵긴 하지만 기회가 충분히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됨과 거의 동시에 여러 유학 박람회를 다니며 본인의 호주 유학을 준비하던 중에 내가 진학했으면 하던 학교에 덜컥 지원서를 내고 조건 부 합격 통지서를 받아 내게 전달해 주었다. 선택은 너가 하는 거라며 무심한 척 내게 ‘Invitation letter’를 건네준 아내의 과감한 결단력을 바탕으로 최종 목적지로 먼 길을 돌아서 호주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실상 호주로의 이민 결정은 단순한 듯 싶었지만 이 외에 다양한 배경이 있었다. 일단 내 스스로는 국외라는 조건에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내 나라도 미처 다 알지 못하면서 해외로 떠난다는 사실이 납득이 되지 않았는데(호주는 그렇게 꿈꾸고 있으면서도...) 우연한 기회로 입대 전 한 달가량 캐나다 벤쿠버에서 머무를 수 있었는데 이 첫 해외 경험이 내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기본 바탕이 되었다. 이후 3년이라는 시간을 군대에 묶여 있으면서 경험한 첫 직장생활에 진저리가 나서 어딜 가든 군대문화가 구조적 기본이 되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나는 직장생활을 할 수 없겠다는 거친 결론을 얻게 되며 기나긴 방황을 시작한다. 이 방황하는 기간 동안 떠돌아다녔던 다양한 국가들. 앞서 말한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남미의 칠레, 그리고 뉴질랜드에서의 생활은  내가 가진 기질이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안정적임을 알 수 있는 충분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당시 교제하던 있던 여자 친구와 결혼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계획하기 시작하면서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던 상황의 우리에게 의외로 한국에서보다 외국서의 생활이 훨씬 경제적인 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나도 호주유학을 계획(?)하고 있었고 미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지금의 아내 역시 외국 유학 및 이민생활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점이 고루 잘 맞아서 우리는 결혼식만 한국에서 치르고 외국으로 떠날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뉴질랜드에서 이민법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그곳에서 정착할 가능성이 더 컷을 테지만 그 길이 막힌 이후로 호주로 계획을 변경하고 뉴질랜드 생활을 마무리하는 동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왜 굳이 호주로 가느냐는 질문을 했다. 뉴질랜드가 건실한 중소기업이라면 호주는 거대한 대기업이라는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호주 이민을 준비했다가 현지에서 실패하고 뉴질랜드로 건너와 영주권을 준비하는 사례가 빈번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구심을 대놓고 드러냈다. 하지만 뭐랄까? 그냥 기회가 그렇게 내게 주어지는 것 같았다. 그제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꿈꾸지도 않았던 인륜지대사라는 결혼을 결정하면서 배우자가 될 사람이 제시하는 청사진에 믿음도 있었고. 심지어 그 당시 결혼을 반대하던 처가댁에 향후 미래계획을 PPT로 제작하여 장인어른에게 보고까지 드렸던 배우자였는데 어찌 신뢰가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그 이후로의 길은 그 계획처럼 흘러가지 않았지만 당시 모든 것이 흐릿했던 내 삶에서 가장 진하게 도드라졌던 이정표를 따라서 결국 나는 호주를 품게 되었다.

 굵직한 배경으로는 이러한 요인들이 있었고 작게는 이제껏 경험했던 유럽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이미 정착한 한인들이 많아 당당히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어 다양한 정보를 얻기도 수월하고 무엇보다 한국 제품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이 또 다른 장점이었고 세계 최고의 임금 수준 체계 역시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늘 감탄을 금치 못했던 대자연의 풍광이 그곳에서도 또 다른 수준으로 이어질 거라는 기대감 역시 기대감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듯한 대 자연의 수준이란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움 자체였다.


 철부지 시절의 막연한 꿈으로 시작한 호주라는 나라에 대한 환상과도 같던 계획이 수많은 경험과 긴 시간들을 지나서 이제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서툴게 말하면 이미 나는 꿈을 이룬 거라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다. 물론 삶은 계속되고 있고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지만 내 인생의 두 번째 고향과도 같은 호주 땅으로의 시작은 이러했다. 어찌 보면 별 거 아닌 이유인 듯싶지만 스스로는 꽤나 치열했던 선택이었다.

 물론 살다 보면 가족들, 친구들도 멀리 있고 고향에 대한 향수로 고생도 하면서 되돌아갈 생각도 가끔 하긴 하지만 당시 호주가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에 그 선택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선택은 만족스러운 결정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하면서 이에 따른 결과들을 앞으로 하나하나 풀어가다 보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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