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난나야 Dec 11. 2019

호주로 이민을 간다고?

2. 신혼? 마냥 핑크빛 만은 아니야. -1부-

 지금 생각하면 뭐 그렇게까지 억척스럽게 짐을 꾸릴 필요가 있었는지 싶다. 꽤나 여행을 자주 다닌 편이라 짐 싸는 일이 그렇게까지 부담스럽지 않았었다고 이미 해외에서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여 가까운 시간을 지내다 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이민 준비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조금 너무하다 싶을 만큼 태평한 자세였다. 그래서 애초에 계획했던 일정은 굉장히 빠듯했었다. 하지만 역시나 삶은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결혼 이후 이전과 다른 안정된 생활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 초반은 급격한 혼돈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기였다.

 

 12월 8일, 유난히 추웠던 그 날, 뉴질랜드에서 돌아온 지 한 달 남짓 시간이 지나 나와 아내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준비과정은 또 하나의 에피소드로 풀어내도 될 만큼 (어쩌면 하나의 에피소드로 안 끝날지도 모를) 다사다난했던 여정이었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다.

 이미 결혼 전부터 우리는 호주 이민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만 그렇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데 있어서 준비기간이 필요했던 거 같다는 당시 생각으로 우리는 호주로 건너가기 전에 몇 해전 내가 혼자 다녀왔던 스위스로 DTS(선교학교)를 함께 떠나기로 합의한 상황이었다. 스위스 본부 측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본 일정은 3월에 시작이지만 우리는 두 달 먼저 합류하여 봉사활동을 하면서 지내기로 결정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는 신혼살림을 차릴 집조차 장만하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결혼 전과 다름없는 시간을 잠시 보내고 있었다. 일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살짝 있었지만 이것이 우리가 결혼 이후 처음으로 갖은 첫 계획이 틀어짐을 알리는 징후인지는 미처 알지 못한 채 기대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어찌어찌 스위스 비자를 발급받고 처가댁에서 장인어른의 적립 마일리지로 우리 비행기 표를 끊어주셔서(이것 역시 앞으로 있을 엄청난 일의 원인이 되고 만다.) 겨울이 눈부신 알프스의 나라 스위스로 우리는 떠나게 된다.


스위스의 상징 마테호른. 10년 전 사진을 들춰내니 화질이 영...




 나비효과라는 게 이런 것인지 싶다.

 처음 일정을 조율하던 과정에서 있었던 스위스 본부와의 작은 마찰이 시작이었을까? 다시 찾은 스위스의 그곳은 같은 사람, 같은 환경이었지만 전혀 다른 기억을 내게 남겼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과적으로 우리는 끝까지 그 일정을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다. 모든 교육일정이 끝나고 다른 동기들은 단기선교 떠날 준비에 분주했던 그 시간에 우리는 쫓겨나듯 그곳을 나와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

 -이 시기의 아픈 기억은 이후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독한 회의감을 남기게 되었고 결국 나는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이어 애초에 마일리지로 비행기 표를 끊었던 지라 귀국하는 일정이 내가 원하는 날짜에 맞출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제네바에서 파리로 들어가는 표는 있지만 파리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자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마일리지로 배당된 좌석이 따로 있어서 거기에 공석이 생겨야만 한국에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을 전해 듣고 나와 아내는 그렇게 예정에도 없던 파리에서 무기한 대기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걱정 없이 태평했던 아내와 다르게 나는 끝없는 분노로 나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인들의 동경의 대상인 파리에서 지내게 되었지만 샹젤리제 거리를 걸어도, 에펠탑을 보아도, 몽마르트 언덕을 올라도 그 풍경이 가슴에 와 닿지 않으리 만치 황량했던 순간이었다. 굳이 호주 이민을 7개월이나 늦춰가면서 결정한 스위스 일정이 이렇게 파탄났다는 사실에, 이제는 돌아가려 해도 자리가 없어 기약 없이 발이 묶여버린 현실등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이런 일들이 왜 지금 나한테 벌어지는지에 대한 압박감. 결국 그 날의 나는 어딘지 알지 못하는 나의 어느 한 부분을 잃고 말았다.

 그 뒤로는 점차 나아졌던 거 같다. 아내의 격려와 보살핌 속에서 조금씩 회복해갔다. 아니 잊어가고 있었다. 아니 생각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던 거 같다. 평생에 언제 한 번 다시 올지 모르는 데 그렇게 화만 내고 있다고 뭐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아내의 지적에 생각을 고쳐먹으니 그제야 파리라는 굉장히 자기 과시적인 도시의 이미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찾아갔던 성소수자들의 대형 연중 행사, 교과서에만 보던 박물관의 예술품들,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고개만 돌리면 황금으로 도금된 조형물들이 가득한 거리 등등 평온한 시골마을 같던 스위스에 비해 다채로운 색깔의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스스로를 내게 강요하는 듯해서 오히려 더 쉽게 전환이 될 수도 있었던 것 같다.

 파리에 첫 숙소를 잡을 때만 해도 길어야 일주일이면 표를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기간은 예상외로 길어졌고 우리는 조금 더 싼 파리 외곽으로 두 번째 숙소를 구했다. 미리 준비하고 건너온 여행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그때 우리는 정보를 찾아서 돌아다녔고, 수중에 여유자금이 바닥나고 있던 터라서 최대한 경제적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아침이면 시내로 나가 길거리 빵집에 들러 빵 하나 사들고 거리 구석구석 구경을 하다가 해질녘이면 차이나타운 쪽으로 건너가 아시아 상점에서 비교적 저렴히 저녁거리를 구입한 뒤 10 유로 안팎의 싸구려 와인 한 병을 사들고 숙소에서 저녁을 해 먹었다. 숙소와 시내와 차이나타운은 전혀 동선이 겹치지 않는 삼각형 구조의 경로를 따라서 우리의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프랑스 요리학교에서 요리를 공부하고 전업 요리사로 근무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다양한 음식과 와인은 물론 식자재, 조리도구의 천국이라는 파리에서 무리를 해서라도 견문을 넓혔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 당시엔 10유로짜리 와인 조차 우리에겐 과분한 호사였다. 그렇다고 그런 와인들이 맛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아내와 나는 더 큰 것들을 바라지 않으며 소소하게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처음 비행기 표를 구입했던 일정은 비수기 일정이었기 때문에 비수기로 지정된 기간에만 표를 옮길 수 있었다. 파리지앵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동안 시간은 성실하게 지나갔고 점차 성수기 일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말은 다시 비수기로 넘어가기까지 약 두어 달 간의 시간을 파리에서 더 버티던가 아니면 새로 비행기 표를 구매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방법 중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경고였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 굉장한 부담이 되는 예산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기회비용을 생각했을 때에는 살인적인 물가의 파리에서 또 다른 두 달을 지내는 것보다 새로 표를 구입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답이 정해진 선택이라 할 지라도 지불해야 하는 비용 때문에 망설이며 혹시나 빈자리가 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하루하루 롤러코스터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던 7월의 파리. 그 날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프랑스혁명 기념일. 우리는 1년 중 가장 성대한 하루를 보내고 에펠탑에서 불꽃을 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시내로 나가보니 거리에서는 군인, 경찰들이 다양한 무기들을 뽐내는 시내 행진이 이어지고 있었고 바삐 건너간 에펠탑이 보이는 그 넓은 마르스 공원은 이미 자리를 잡은 인파로 가득했다. 겨우 공원의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점심 나절부터 우리는 그렇게 마냥 밤이 오기를 싸구려 와인 한 병과 작은 살라미로 버틴다는 계획이었다. 어차피 며칠 뒤면 성수기가 시작이라 새로 표를 끊어야 할 것 같은 상황으로 굳어지는 것 같아서 포기한 채로 떠나기 전 마지막 호사라며 밖으로 나온 것이었는데 그 날 마침내 항공사 측에서 자리가 났다며 연락이 왔다. 어쩜 그렇게 시기도 적절히 연락이 온 건지... 우리는 너무 기뻐하면서 마침내(?) 파리를 떠나게 되었다며 화려한 에펠탑에서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를 감상하며 파리지앵 생활은 막을 내렸다.

 

파리생활. 아니 반년 간의 유럽생활 마무리를 축하하는 듯 화려했던 불꽃


 


지금 다시 그 날을 곱씹어 보며 글을 써 보지만 6개월가량 보냈던 스위스는 단 몇 줄로 마무리가 되고 한 달 남짓 지냈던 파리의 이야기가 훨씬 길어지는 것은 여전히 그 날의 스위스는 내게 악몽으로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호주 이민 준비를 시작하는데 서두에 언급했듯이 이건 이전의 경험들과는 또 다른 세계였다. 늘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전제하에 짐을 꾸리는 것과 언제 돌아오게 될지 모르는 일정으로 떠나는 짐을 꾸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지만 나는 이를 너무 얕잡아 보고 있던 것이었다.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이 될 것으로 여겼지만 이제 이민 준비라는 또 다른 산이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 본격적인 이민 준비 이야기는 2부에서 이어집니다.

작가의 이전글 호주로 이민을 간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