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혼, 마냥 핑크빛은 아냐? -2부
등 떠밀 린 듯 빠져나와야 했던 스위스, 그리고 마냥 기다림의 연속이었던 파리를 거쳐 다시 한국. 6개월이란 시간 동안의 유랑생활을 겨우 마치고 돌아와 한 숨 돌릴 시간도 없이 우리는 본격적인 이민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10월에 첫 학기가 시작이었다. 약 3개월 남짓한 시간이 남았고 한정된 시간 안에 우선순위를 세워 준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모든 물리적인 준비에 앞서서 아내는 영어를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년기를 미국에서 자라고 꾸준히 영어공부를 해와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아내와 달리 토종 한국인으로 20년을 넘게 외국인과 영어 한마디 안 하고 살다가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겨우 외국 구경 몇 번하고 간간히 외국생활을 하며 실전 영어(?)를 다져온 내 영어실력이 당최 못 미더웠던 것 같았다. 여러 학원을 비교하고 강남에 있는 영어학원에 등록을 했다. 주 5일 수업에 세 시간씩 외국인 강사와 나를 포함한 세명의 학생이 회화위주의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과정이었다.
이와 더불어 당연히 물리적인 준비도 함께 진행되었고 나름 호주의 이웃나라인 뉴질랜드에서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짐을 꾸렸는데 다시 돌아온다는 전제하에 짐을 챙기는 것과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이민을 준비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이전까지는 비행기 수하물 규정에 맞춰서 꾸역꾸역 짐을 꾸렸다면 이번엔 내가 원하는 만큼 짐을 보낼 수 있지만 그에 따르는 상당한 비용을 생각해서 최대한 지혜롭게 짐을 싸야 했다.
우선 해외 이사 배송업체를 선정하는 것부터가 큰 일이었다. 당시 국내에 여러 업체들이 있었고 이름만 대도 알만한 택배업체들부터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던 배송대행업체들까지 수십 개의 업체들이 다양한 견적을 제시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저렴하면서도 이름이 알려진 업체를 원했지만 너무 싸도 의심이 된다는 처가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아내의 동창이 얼마 전 호주 내 다른 도시로 이민을 가는데 이용했다는 결정적인 이유로 해외 주재원 전문이사업체를 선정했다. 항공으로 보내는 해외 배송은 무게당 과금이 되는데 비해 선박으로 보내는 배송은 부피당 요금이 부과된다. 그 당시엔 이름도 생소했던 큐빗이라는 단위로 부피를 환산해서 1큐빗에 얼마 이렇게 정해졌고 기본 3큐빗 이상이 되어야 견적을 받을 수 있는 구조였는데 지금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사실 우리는 결혼 후 바로 해외로 떠나는 터라서 신혼살림도 없었고 흔한 가전제품 하나 준비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각자가 가진 짐을 최대한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 와중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던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침대, PC, 주방용품 등을 열심히 발품 팔아 구입했고 나머지 세탁기나 냉장고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은 현지에서 중고로 구입하기로 했다.
서서히 그렇게 이삿짐의 윤곽이 잡히는 듯 보였고 호주까지 배송을 받는 데에는 약 4주가 필요하다는 업체의 견적에 따라 학교 일정 한 달 전에 짐을 보내고 우리는 호주로 미리 건너가서 짐이 도착할 때에 맞춰 살 집을 마련하는 쪽으로 대략적인 시간 계획도 세웠다.
그러다 보니 예상보다 시간이 엄청 빠듯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세웠던 계획은 8월 중순쯤 한국에 들어오게 되고 한 달 정도 준비해서 호주에 건너가 10월에 학교를 시작하는 것이었는데 아마 이대로 했었다면 준비하는 기간 동안 밤을 새야 했을 거라면서 어떻게 보면 일찍 귀국한 것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아내가 수시로 건넸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비틀린 일정 때문에 뒤틀어진 심기가 여전히 불편했고 그 마음은 쉽사리 풀리지 않아서 한켠에 늘 독기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여전히 계속되고 있던 학원 수업, 앞당겨진 일정에 서운해하는 가족과 지인들과도 시간을 보내느라 개인적인 시간이 거의 없을 만큼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직항으로도 11시간이 걸리는 비행거리에 떨어진 나라로 이민을 가는 터라 자주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만큼 애잔했던 시간들이었다.
사실 거창하게 이민 준비라고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호주로 이미 행선지는 정해졌고, 학교도 미리 아내가 유학박람회를 통해서 지원했던 터라 영어 조건만 맞춰서 건너가는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말 그대로의 백수, 아내는 프리랜서였기 때문에 직장을 정리해야 하는 부담감 없고, 신혼집 하나 없는 처지였기에 가져갈 대형 가전제품이나 가구 하나 없던 단촐한 처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훨씬 수월했다.
오히려 가진 게 없었기에 선택지가 더 단순했고, 포기해야 할 것이 적었기 때문에 이민을 결정하기가 쉬웠다. 우리가 가진 재정적인 상황에서도 한국보다는 호주에서 시작하는 것이 당장에 큰 목돈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되려 합리적일 수 있는 선택이었다. 게다가 아내 친구 중 한 명이 시드니 외곽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나와 아내가 살 집을 구하기 전까지 그 집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일정한 집세를 내면서 지내는 것이었고 외국에서는 흔한 주거형태인 “셰어하우스” 개념의 공동생활이었지만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지인이 있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집 상태나 누구와 같이 지내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거주지를 결정하는 것은 너무 큰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도 처음이었던 이민 준비였기 때문에 지금 보면 실수였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다. 짐을 최소한으로 꾸린다고는 했지만 이곳에서 구할 수도 있는 제품들에 대한 가격정보나 품질, 호환 부분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었고 지금 보면 굳이 필요했을까 싶은 짐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요리학교에 진학을 하고 주방에서 일을 하게 된다는 점에 아무 준비가 없었어서 나중에서야 아쉬웠던 점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 이민이라는 큰 행사를 치르는 데 있어서 이런 자잘한 실수 하나 없을 수 있을까. 누구 하나 조언을 얻을 곳도 없었고, 우리 둘에게도 이민 준비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면 최선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이 정신없던 기간 중에 7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기억에 선명한 날이 있는데 그 날은 바로 이삿짐 업체에서 집으로 찾아와 모든 짐을 포장하던 날이었다. 약속된 날 전에 모든 짐을 처가댁으로 옮겨놓았고 두 명의 기술자가 다양한 크기의 상자를 들고 와서 종류에 따라 분류하며 차곡차곡 상자에 정리했는데 빠르게 진행되는 그 들의 실력에 놀랐고 생각했던 것보다 쌓인 이삿짐 상자가 훨씬 많아서 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이삿짐도 다 꾸려서 보내고 나니 이제 진짜 떠나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한국을 떠나는 것이 아쉽거나 슬프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마냥 설레고 흥분되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의 막연함이랄까.
감사하게도 호주로 떠나는 비행 편을 장인어른께서 그동안 모아두신 마일리지로 직항 편을 마련해 주셨다. 스위스로 떠날 때도 신세를 졌는데 이번에도 편의를 봐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고 심지어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처가댁에서 보내고 공항 배웅까지 직접 해주셨다. 물론 사위에 대한 사랑도 있으셨겠지만 애지중지 키워오신 딸이 먼 길을 떠나는 모습이 무척 애틋하셨던 든 싶었다. 아내에게 듣기로도 이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항 마중을 해주신 것이라고 하는 걸 보면....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 그 날이 되었고 우리는 간신히 시드니행 비행기에 올라타게 되었다. 시드니행 비행기 안에서 이제껏 꽤 고생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일들과 비교할 수도 없는 수월한 일들이었음을 7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 보며 한 번 웃음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