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드디어 호주.
안정적인 직장, 넘쳐나는 살림살이, 정신없이 몰두 중인 취미생활, 때마다 연락하며 지내는 몇몇의 지인들. 호주 이민 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소박하게나마 안정적인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동안 조금씩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하면서 일정하게 유지되던 체중이 최근 부쩍 늘어난 것을 보면서 이제야 심리적으로도 안정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2013년 9월 13일, 이른 아침시간 시드니 공항에 비행기가 도착하면서 시작된 우리의 이민생활이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안정을 찾게 될 줄은 그 당시엔 미처 몰랐었다.
해외생활이 첫 경험도 아니기도 했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생각이 없었던 때문일까. 비행기에서 내려 시드니의 첫 공기를 들이 맡으며 사실 큰 걱정은 없었다. 이민 법이 어떻고, 영주권은 어떻게 신청해야 하는지 따위의 일들은 당시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문제였다. 임시로라도 머물 수 있는 아내 지인의 집이 있었고 아직 학교 수업이 시작 전까지는 꽤나 여유가 있었기에 대책 없는 느긋함으로 호주 시드니 땅을 밟았다.
지금에야 공항에 도착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척척이지만 당시엔 아무 지식이 없던 터라 유학원에서 연결해준 pick up service를 간신히 이용해 공항에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Hornsby라는 지역에 있는 아내 지인의 집으로 갔다. 남편은 출근을 했고 세 살짜리 아이 한 명과 함께 아내 친구가 집 앞으로 마중을 나와있었다. 방 두 개가 딸린 아파트에서 살던 아내의 친구는 안방을 본인 가족이 사용하고 남은 방 한 칸을 Share room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마침 방이 비는 시기가 비슷해 우리가 그 방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비용은 주에 $260. 그렇게 우리의 시드니 생활은 Hornsby 역 앞 아파트 7층에서 시작되었다.
시드니에 도착하기 전까지 너무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냈던 탓일까? 시간에 쫓겨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자 한동안 집 밖 거의 나가지 않았다. 당시 집 앞에 아주 큰 Shopping mall이 있었는데 장을 보거나 잠시 산책 겸 그곳을 돌아다니는 일과 주 1회 교회를 오가는 일 외에는 외출 없이 집에서만 머물렀다. 그도 그랬던 것이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해외를 떠돌며 있었던 여러 우여곡절은 물론 한국에 돌아와서도 일정에 쫓겨 이민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개인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많이 지쳐있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집주인들이 시내 한 번 안 나가고 관광조차 안 하냐고 물으며 굉장히 의아해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한 주, 두 주가 지나면서 여러가지로 시달렸던 마음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시내에 있는 유학원 사무실도 들리고 시내 구경도 할 겸 호주에 오고 처음 바깥나들이를 아내와 나섰다. 표를 사고 기차에 올라 처음 시내로 나섰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제껏 지내왔던 다른 해외의 도시들의 모습을 기대하며 나섰던 시내의 모습은 그 기대와 전혀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스위스의 여러 도시들을 다녀도 고층빌딩을 하나 볼 수 없었고, 고즈넉한 인상의 도시들 뿐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시내도 도시 자체가 문화유산인지라 옛 건물들을 최대한 보존해서 이용하고 있었고 살짝 외곽으로 나서야 현대적인 도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뉴질랜드의 최대 도시인 오클랜드 시내 조차 적당히 큰 건물 몇 개 있어 도시 풍경이 그렇게 삭막해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 호주의 최대 도시인 시드니 시내의 풍경은 마치 한국 강남거리 마냥 빼곡히 들어선 고층건물들로 인해 시야가 막혀있어 답답했다. 여행객, 회사원, 학생, 노숙자들이 뒤섞여 북적거리던 그곳의 첫인상은 도시의 삭막함이었다. 인생을 걸고 지구 반대편에서 찾아온 우리 두 사람을 반기는 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날 선 긴장감과 낯선 외부인을 경계하는 듯한 무관심한 태도가 그 날 우리가 느낀 전부였다.
시드니의 상징이라는 Opera Hose와 Hobour bridge도 Darling hobour 역시 아무 감흥을 주지 못하고 우리는 시드니라는 대 도시가 주는 위화감에 압도되어 첫나들이 겸 관광을 마치고 주눅이 들어 집에 돌아왔다. 지금까지 지냈던 도시들과 대비되는 차가운 인상을 가진 이곳으로 이민을 결정한 것을 체감하며 온갖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렇게 또 한 동안은 시내로 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진학한 학교의 예비 소집일이 되어 처음으로 학교를 찾아간 날이었다. 소집일이면 으레 그렇듯 안내에 따라 줄줄이 이동하면서 본인 확인을 거쳐 등록을 하고 학교 상징이 박힌 조리도구 가방, 조리복, 교재 등을 받았다. 물론 단체로 강당에 앉아 학교 및 관계자들의 소개를 듣는 시간도 이어졌다.
나이가 꽉 찬 학생 신분으로 나보다 7-8년은 어려 보이는 동기들 사이에서 멋쩍은 시간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집 식구들과 함께 받은 조리도구며 조리복들을 펼쳐보니 그제야 긴장이 풀어지며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간 것이 실감이 났다. 만만치 않은 등록금을 투자하며 이민의 첫 관문으로 선택한 요리학교였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결연함도 샘솟았다.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니라 아내의 삶까지 책임져야 했기에 남보다 더 투철한 정신무장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나른한 여유를 부리던 시간들도 어느새 끝이 나고 본격적인 이민생활의 첫 관문인 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온하기만 했던 날들이었는데 학교 수업이 시작되면서 시드니 생활의 첫 위기가 찾아오는데 그것은 전혀 생각을 못했던 당시 머물던 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