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등 뒤에서 칼날이 날아와 박히다.
한국이나 호주나 결국 문제는 사람이다. 환경이 어떻고 시스템이 어떻고 하는 건 둘째 문제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호주로 건너온 뒤로 이래저래 시간이 흐르고 학교 수업도 걱정했던 것보다 별 무리 없이 쫒아가고 있음에 스스로 감탄하는 등 언뜻 보기엔 꽤나 순조롭게 모든 일이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곧 닥쳐올 문제는 바로 우리 등 뒤에서 교묘하게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 당시만 해도 우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처음 호주에 도착 한 날부터 아내 친구의 가족과 함께 한 집에서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두 살이 채 안 되는 사내아이가 있는 집이었고 심지어 둘째가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상태였다. 호주 물정에 익숙한 지금 돌이켜보면 share mate를 구하기 쉬운 조건이 아니다. 대부분의 커플이나 싱글이 찾는 share house는 본인의 학업이나 업무 등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조용히 쉴 수 있는 조건이다. 하지만 아이가 있는 집은 아무래도 서로가 불편할 수 있는 상황이라서 보통 아이가 생기면 셰어하우스를 접게 된다. 그러나 아이를 좋아했던 아내였고 나 역시 이전 보모 아르바이트를 통해 아이들과 어느 정도 교감하는 법을 익혀둔 터라서 그다지 큰 고민거리는 아니었고 또 막상 그 아이와도 금새 친해질 수 있어서 나름 잘 지낸다고 우리 딴에는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공동생활은 순항하는 듯 보였다.
우리보다 몇 년 먼저 호주에 건너와 지냈던 터라 우리에게 여러 정보를 나누어 주어 큰 도움이 되었고 나는 학교가 시작된 이후 실습시간에 만들었던 요리들을 집으로 가져와 함께 나눠 먹으며 생면부지의 서양요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나누었다. 일요일이면 함께 같은 교회도 가고 휴일이면 근교로 소풍도 다니면서 관계가 원만해지는 듯 싶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우리도 곧 도착할 이삿짐을 들여놓을 수 있는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쪽 역시 곧 태어날 둘째를 위해 좀 더 넓은 집으로 옮길 계획을 하고 있던 터라서 기왕이면 두 가정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자는 이야기도 진지하게 나누고 실제로 같이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진짜 이렇게 두 가정이 앞으로도 함께 살게 될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집을 구하고 있는 동시에 아내와 나는 호주에 자리 잡으려면 자차가 필수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고 본격적으로 호주에 정착하기 위한 실제적인 수준의 결정사항들이 늘어가고 있어 나날이 고민이 깊어지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우리는 청천 병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지내던 아파트에는 각 세대에 주기적으로 점검을 나오고 있었는데 이는 계약에 등재된 이름의 구성원이 살고 있는지, 파손되거나 보수가 필요한 부분이 없는지를 주로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다. - 형식적인 점검 뒤 통상적으로 세를 5불 정도 인상을 위한 구실이기도 하는데 이를 보통 inspection이라고 부른다 - 마침 배관공이 들러 세탁기 배관 부분을 손보고 갔는데 그 배관공이 관리사무소에 이전에 안보이던 사람이 있다고 보고해서 이 점검이 2주 뒤에 예고되었다면서, 우리가 계약서에 이름이 올라있지 않기 때문에 방을 비워줘야 할 것 같다는 통보에 가까운 이야기를 집주인에게 들었다.
나름 그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있던 상태이기도 했고 두 가정이 모두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릴 거 같아 이사는 차순위 문제로 느긋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곳에 1차로 정착하려는 의논까지 마친 상태라서 한국 이삿짐센터에 보관 중이던 우리 이삿짐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해두어서 공교롭게도 딱 그 2주쯤 뒤에 짐이 도착할 예정이었다. 나와 아내는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주말마다 방을 보러 다니긴 했지만 느긋하게 여러 조건을 따지던 그전까지 와 상황이 달랐다. 나름 우리도 뭔가 찝찝한 느낌이 있어서 그 가족들과 따로 살 수 있는 집을 구하는 차선책을 염두에 두고 시간을 내어 다른 집을 보기도 했었는데 그전까지 해외에서 지내면서 share house의 문화가 개인적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아내를 설득해 우리도 share house를 염두에 둔 큰 집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아내가 상처를 받고 더 이상 share house는 싫다는 조건을 달아 우리 끼기만 지낼 수 있는 집으로 조건을 바꾸어 집을 알아봐야 하는 처지였다. 당시 차도 없이 대중교통으로만 다녀야 하고 심지어 지리도 익숙하지 않던 우리에겐 여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꽤나 당황하여 멍한 상태였지만 상황 태세 전환이 빠른 아내는 당장 문제를 파악하고 빠른 속도로 필요한 정보들을 모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해외이사를 담당한 업체에서 연락이 와 배가 곧 도착하고 통관절차를 받게 되면 바로 배송이 시작된다고 알려왔다. 그리고 교묘하게 이 날은 우리가 방을 비워줘야 하는 날과 겹쳤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할 겨를이 없어졌다.
일단 당시 계획으로 최소 2년은 더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학교와 가까운 지역과 시내로 일을 나가기에 교통이 편리한 지역을 우선 조건으로 집을 보러 다녔다. -당시 운 좋게 직장을 구해서 학업과 병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30도를 오가는 초 여름 날씨에 대중교통과 도보로 집을 보러 다니는 것은 고역이었다. 이곳 호주의 구조는 빈 집이 있으면 부동산 웹사이트에 집을 볼 수 있는 날짜와 시간이 공지되고 이 시간 외에는 집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계획을 잘 짜야했다. 게다가 한국 물이 덜 빠졌던 당시엔 이곳의 대중 교통비란 살인적인 체감 수준이어서 최대한 돈을 아끼는 방법으로 동선을 짜고 시간에 쫓겨 여러 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아내와 나는 중간중간 탈진에 가까운 상태로 공원에 널브러지기 일쑤였다.
현재 상황과 달리 그때는 학생비자로 집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보증인이 있는 상황도 아니었던 터라서 마음에 드는 집이 있으면 웃돈을 주거나 두세 달치 임대료를 한꺼번에 지불을 하는 조건(한국과 달리 호주는 전세는 아예 없고 월세가 아닌 주세가 기본이다)을 내걸지 않으면 세입자로 선택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게다가 세입자 신청에 필요한 기본 서류만 해도 열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안타까운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고 우리는 초조했다. 이삿짐은 시기를 지나면 적지 않은 보관료가 붙기 시작할 테고 숙소는 단기로 어디 호스텔에서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될지도 몰라 불안했다. 수많은 집을 보고 지원서를 작성하기를 여러 번. 운명이었을까? 마침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 조건과 맞는 집을 찾았고 지원서를 제출했다. 게다가 우리도 세 달 치를 선불로 지불할 의사가 있다면서 간절한 의사를 보였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가 세입자로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고 알고 보니 집주인도 한국인이었던 터라서 한국인 지원자였던 우리가 뽑힌 상황이었는데,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와야 하는 날에 마침 해외 이삿짐 배송이 가능해서 우리는 입주일을 그 날로 정했다.
이사할 집을 찾았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가져오는 짐은 혼수로 장만한 침대와 PC 한 대 및 조리도구들 외 개인적인 짐들 뿐이었다. 생활에 당장 필요한 냉장고, 세탁기, 책상 등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고장터에서 모든 것을 구해야 했고 이삿짐을 옮기려 차를 한 대 빌리는 김에 그 모든 살림살이를 같이 옮기려니 시간이 빠듯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점은, 나보다 훨씬 영어에 능통한 아내가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주 3일 학교에 가서 10시간 넘게 매달려 있다 돌아오고 다른 3일은 연회 주방에서 아침 9시부터 자정을 넘겨서 까지 일을 하던 상황의 나는 모든 일을 아내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어찌어찌 당장 필요한 살림살이를 중고로 구입하고 트럭 한 대도 가격을 비교하며 꽤나 먼 곳에 있던 업체에서 빌려두었다.
시간에 쫓겨 급하게 일을 진행한 것 치고는 매끄럽게 모든 일이 매듭이 지어졌고 이제 이삿날 만 기다리며 당시 살던 집에서 밤마다 이삿짐을 싸기 시작했다. 단 두 달여 만에 항공 수하물 규정 내의 짐이 몇십 박스로 불어난 기적(?)을 경험하며 박스를 구해 짐을 꾸렸다.
드디어 이삿날이 되었고 새벽같이 일어나 미리 예약한 차를 받아 중고로 구입한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책상을 구매하려 들렀던 집에서 곧 귀국한다는 사정을 듣게 되어 책장 밑 여러 소품들을 덩달아 구입하고 출국 전까지 사용하려던 식탁 및 의자까지 구매해버려 당장 다음 식사부터 바닥에 앉아서 먹어야 한다는 행복(?)에 겨운 이야기를 귓등으로 날리며 바삐 짐을 날랐다. 서두른다고 했지만 길도 모르는 상황에 Navigation도 없이 휴대폰에 겨우 의지해서 시드니 구석구석을 오가다 보니 벌써 해가 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원래 살던 곳에 들러 짐을 옮길 차례였다. 잔뜩 힘주어 다니느라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아파트에 도착해보니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우리가 이사하는 당일에 마침(?!) 약속이 있다며 겸연쩍어하던 그 얼굴이 떠올리며 현관문을 열자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 벌어져 있었다. 우리가 정리해서 쌓아둔 모든 짐이 우리가 머물렀던 방이 아니라 화장실에 처박혀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방은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잦은 inspection에 대처하기도 힘들다며 우리가 나가면 새로 사람을 구하지 않겠다던 그들이었다. 짐을 옮길 수고를 덜어주기 위한 배려(우리 방보다 화장실이 현관에 가까운 구조였다)라고 보기엔 현관 근처로 옮기기 편하게 짐을 넣어둔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화장실에 옮겨두었다는 사실이 꽤나 신경을 거슬리기 충분했지만 시간에 쫓기고 있던 중이라 마음을 고쳐 잡고 바삐 짐을 옮기기 시작하는 중에 그 부부와 아이가 나타났다. 자정에 가까웠던 상황이라 아마도 그 시간이면 이삿짐을 모두 빼고도 남았을 거라 생각했는지 우리와 마주치자 굉장히 당황한 모습으로 대충 형식적인 인사를 한 뒤 제 방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나도 나였지만 몇 년을 알고 지낸 친구의 그런 태도에 아내는 마음을 많이 다치게 된 순간이었고 도대체 왜 그렇게 순조롭게만 보이던 관계가 이렇게 결말을 내게 되었는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겨우겨우 차에 모든 짐을 옮겨 싣고 떠나기 전 남편 되는 사람이 나와 잠시 손을 거들면서
“이 부부는 당해 낼 수가 없어”
라고 한 것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과연 그것이 무슨 의도 였을까?
분한 마음에 어떻게 친구가 그럴 수 있냐며, 떠나는 마지막 길에 인사조차 않는다면서 우리는 퉁퉁부은 얼굴로 새 집에 도착해 또 어찌어찌 다음 날이 되었다. 그 날은 해외 배송 이삿짐이 도착하는 날인 동시에 냉장고와 세탁기 등의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하는 날이기에 학교에서 알게 된 근처 사는 힘 좋은 동생 한 명을 섭외해 같이 다녔다. 장정 둘이서 세탁기와 400 liter 냉장고를 또다시 시드니 구석구석을 돌며 옮기는 동안 아내는 이삿짐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바빴고 무사히 모든 짐을 옮기고 이삿짐 배송도 끝이 나서 우리 셋은 근처 한인 중국집에 들러 이삿날에는 짜장면이라는 공식과 함께 폭풍 같았던 우리의 첫 이사가 마무리되었다.
이후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은 혹시나 하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 부부는 같이 생활을 하면서 점점 우리를 향한 불만이 늘어갔고 대화를 통해서 풀어가기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배관공이 관리사무실에 신고했다는 핑계를 빌미로 우리 부부를 쫓아내기로 미리 입을 맞춰둔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7년을 알고 지낸 친구사이라고 하지만 같이 사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고 표현하는 방식도 다른데다 우리보다 훨씬 내향적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 겹쳐져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렇게 갑작스럽게 얼굴을 싹 바꾸고 남 대하듯이 할 일이었나 싶은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얼마 후 있던 두 가지 일들로 우리는 아예 그 부부와 손절하게 되었다.
첫 번째 일은 우리가 이사 나올 때 두고 나온 작은 물건이 기억나서 아내가 연락을 하니까 자기들 지하실 창고에 넣어뒀다는 대답이었다. 뻔히 우리 물건인 줄 알면서 연락도 없이 창고에 옮겨 뒀다는 말이 섭섭하기도 했지만 꼭 필요한 물건이었기에 우리 해외배송 이삿짐에 있던 그쪽이 부탁한 물건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아내가 따로 만났지만 그 간의 안부도 묻지 않는 등 차가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아내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두 번 째는 우연히 발견하게된 그 친구가 호주 한인 online community에 우리 험담을 한 것을 발견한 일이다. 분명 우리가 들어가기 전에 그 방을 쓰던 사람이 개인 짐으로 TV를 들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전자기기 가진 거라고는 노트북 두대에 핸드폰 밖에 없던 우리 때문에 전기세가 급등해 뒷목을 잡았다는 글이었다. (호주는 전기세를 분기별로 청구한다.) 그래서 다른 핑계를 대서 우리를 내보냈다고 지인이랑 같이 사는 것도 추천하지 않는다며 댓들을 달았는데 그 뒷얘기를 통해 그간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우리가 나가면 가족끼리만 살 거라던 것도 거짓말이었고 바로 다른 방 세입자를 구하기 위해 우리 짐도 전부 화장실로 옮겨두었던 것이었다.
이 일은 적잖은 상처가 되어 현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움츠러들게 하는 요인으로 남아 극복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의도치 않은 우리의 본격적인 둘만의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후 지어진지 한 30년은 더 된 듯한 그 집에서 장장 3년이라는 시간을 지지고 볶으며 살면서 호주 이민 생활 초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이제는 잔뜩 정들어 버린 애틋한 호주의 첫 고향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이민 초기에 있었던 이 첫 위기는 향후 겪에될 수많은 어려움들에 비하면 애들 장난 같은 수준이지만 당시엔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던 지인을 잃으며 우리는 쓰라린 교훈을 얻었다. 결국 문제는 사람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