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난나야 Mar 02. 2020

호주로 이민을 간다고??

6. 서른에 시작된 인생의 2막.

 며칠 전 여느 날과 다름없는 늦은 퇴근길이었다. 집으로 향하고 있는 전철 안에서 내 맞은편으로 한 친구가 비지땀을 흘리며 앉았다. 슬쩍 눈을 들어 보니 영락없이 같은 직종에서 일을 하고 있는 친구였다. 조리도구가 잔뜩 들어있음 직한 묵직한 칼 가방부터 여전히 이마에 선명히 새겨진 조리모의 흔적까지 대충 훑어보아도 이제 갓 요리계에  입문한 행색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 짬(?)이 되면 보이지 않는 모습들- 막 일과를 끝마치고 주방에서 빠져나온 모습. 하루의 고된 피로가 묻어남과 동시에 여전히 가시지 않는 열정의 흔적들이 똑같이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내 모습과 대비되면서 문득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어렴풋한 기억이 났다. 다음 정차역에서 하차하는 그 친구의 뒷모습에 무언의 격려를 보내며 내게도 쉽지 않았던 그 시절을 문득 떠올리게 되었다.



 Le Cordon Blue.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이름의 요리학교. 내가 스물아홉의 나이에 진학하게 된 학교가 바로 이 곳이었다.

 지금의 아내와 아직 연애를 하던 그 시절의 나는 뉴질랜드에서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결혼 이야기가 오가면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서로 고민이 많았다. 음악치료를 더 공부하고 싶었던 아내와 전역 이후에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내 처지에 이민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영주권과 진로를 동시에 해결하기에 ‘요리’가 가장 내게 적합하다는 설득에 어찌어찌 수긍을 한 뒤 당시 머물던 뉴질랜드에 있는 요리학교와 영주권 취득과정을 알아보던 중 급작스레 당시 이민법이 바뀌면서 학업 후 이민의 길이 막히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원래 목적지였던 호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고 어느 날 아내가 본인의 유학정보를 얻기 위해 찾았던 박람회에서 이 유명한 요리학교의 지원료를 면제해주는 행사를 발견하고 덜컥 나 대신 지원서를 접수한다. 이후 나에게 여권사본이니, 졸업한 학교 정보 등의 개인 정보를 얻어가더니 혼자서 필요한 갖가지 서류를 나 대신 발급받아 학교 진학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마치고 조건부 합격(당시 필요한 영어자격점수가 없었다) 통지서를 받아 내게 전달해 주었다. 여기까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이제 선택은 내 몫이라는 말과 함께.

 사실 요리사로 진로를 확정 지은 것도 아니었고 아직은 갈팡질팡하던 시기였다. 당시 계획은 아내가 먼저 진학을 하고 내가 무슨 일이든 하면서 돈을 벌어 생활을 꾸려가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아내의 머릿속에 문득 이래서는 우리가 살아남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세울만한 경력이나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 나를 내세워 가정을 꾸리기에 너무 험난한 길이 예상되기에 이 인간을 먼저 공부시켜서 안정된 직장을 갖게 하는 게 여러모로 합리적이었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마음의 결심이 확실했던 것도 아니고 내 손으로 직접 지원하지도 않은 학교의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든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어린 시절부터 명확하게 계획했던 내 미래가 있었지만 군 전역 이후 모든 것이 뒤바뀐 선택들로 인해 나의 오랜 꿈이 사라져 뒤늦은 인생의 방황을 하던 중에 떠난 뉴질랜드였기에 더더욱 받아들이기가 쉽지가 않았다. 숱한 밤을 고민하고 당시 주변 사람들과 의논해보았지만 너무도 불투명한 선택이라 만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당시 호주로의 이민 길이 막혀 뉴질랜드로 건너와 영주권을 취득한 뒤 역으로 호주에 들어가는 방법을 선택한 한인들이 많았기에 되려 뉴질랜드에서 호주로 건너간다는 이야기에 다들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아내의 학업까지 고려하고 앞서 이야기한 이민법 개정으로 인해 나에겐 이 것만이 유일한 통로였고 결국엔 그 길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로의 이야기는 이전 글에 씌인대로 귀국 후 결혼을 하고 스위스와 파리를 거쳐 호주에 들어오게 된 그 여정이었다. 약 한 달의 기간을 두고 결혼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압축적으로 진행하는 정신없는 와중에 마지막 남은 입학 조건인 영어점수를 만들기 위해 Ielts 공부를 병행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간신히 턱걸이로 조건에 맞는 점수를 만들었다.

 요리 유학 후 이민이라는 방법은 분명했지만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것이 어느 학교에 진학하느냐는 문제였다. 이미 ‘Le Cordon Blue’라는 학교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엄청난 등록금이 부담이 되어 상대적으로 저렴한 다른 사립학교나 공립 기술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두고 유학원 관계자들과 상담도 여러 번 하는 등의 진통이 있었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경우에 내세울 수 있는 학교의 brand power를 고려했을 때엔 역시 ‘Le Cordon Blue’가 최선의 선택 같아 보였다. - 이 부분에 관해서는 차후에 다시 다뤄볼 예정이다-

 나를 주저하게 만든 그 학교의 등록금은 무려 한 학기에 당시 환율로 천만 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심지어 첫 학기에는 조리도구, 조리복 등을 구입하는데 제출해야 하는 돈이 포함되어 천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이었기 때문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요리과정을 마치는 데엔 1학기에 10주 과정으로 3학기를 수료한 뒤 6개월 간의 실습기간이 포함되어있었다. 얼추 계산해도 4천만 원에 가까운 돈이 학업에 필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부분은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도움을 받기로 했다. 집안 사정을 뻔히 알기에 이 부분 역시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이 덕분에 아마 수업과정에 나는 20000% 집중하며 온 힘을 쏟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저런 뒷 배경을 가지고 드디어 예비소집일이 되어 처음으로 학교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이전에 학교 가는 길도 미리 익힐 겸 입학 전에 학교를 찾아 외관만 본 적이 있지만 겉에서 보기엔 내가 그 큰돈을 들여서 진학하는 학교이자 세계적인 명성에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TAFE이라는 호주 국립 기술학교의 건물 일부를 임대하여 학교가 운영되고 있는 점이나 생각보다 작은 규모에 첫인상은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몇 없는 그 당시 학교 사진 중 주차장 앞에 있던 학교 현판(?)

 

소집일 당일에 그 검소한(?) 외관의 학교로 들어서자 세계 각국에서 진학한 동기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중 단연 동양인들의 비중이 높았고 그 와중에 여기저기서 익숙한 한국말이 들리고 있었다. 본 학교에 진학하기 전 어학원에서 같이 수업을 들으며 이미 친분을 쌓은 사람들이 이미 무리를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 한눈에 보아도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동기들과 뒤섞여 학교 측 안내에 따라 등록절차를 마치고 수업에  필요한 학교 교재 및 학칙 등이 적힌 안내 책자를 차례차례 받아 들고 나니 대 강당에 모여 앞으로 수업을 담당할 교수들 및 교직원들이 소개되고 수업 진행 방향 설명 등등의 관례 수순을 밟았다. 원체 튀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이라 묵묵히 안내되는 정보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동기들을 차분히 지켜보았다. 꽤 많아 보이던 동기들이 일단 조리과정과 제과제빵과정으로 나뉘고 내가 속한 조리과정의 학생들은 ‘월화수’ 혹은 ‘목금토’ 두 개의 학급으로 분류된 뒤 한 학급이 다시 열명 남짓한 세 개의 반으로 배정되었다. 이제 갓 시작된 학업에 잔뜩 달뜬 모습이 역력한 어린 친구들 사이로 간간히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동기들도 보여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지리했던 학업안내 시간이 질의응답을 마지막으로 끝이 나며 그 날의 절정이었던 학교 로고가 새겨진 조리도구와 조리복 등을 받는 시간이 되었다. 생전 처음 손에 쥐어보는 갖가지 조리도구와 가방에서부터 조리복까지 새겨진 파란 리본 모양의 학교 상징이 나뿐 아니라 여러 동기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금은 쌍둥이칼로 불리는 Henckel사의 제품들로 바뀌었지만 그때만 해도 Wusthof 제품들로 구성된 조리도구를 하나하나 꺼내보며 손에 쥐어보니 그제야 내가 진짜 요리로 먹고살아야 하는 운명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 실감이 났다.

 지금에야 그 조리도구들은 저 어디 구석에 뿔뿔이 흩어져 보관(?)되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칼만 손에 쥐어도 마치 Thor가 Mjolnir를 손에 든 것 마냥 당장에라도 주방에서 날아다닐 것만 같은 환상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자만에 빠진 환상 덕분에 그 후로 꽤나 고생을 하게된다. 나 뿐만 아니라 경력이 없던 동기들이 쉽게 겪었던 상황이었는데 모든 것이 갖춰지고 지원되는 학교에서 나와 실력이 비슷한 동기들과 요리하는 환경과 달리 실제 주방에서의 현실은 마음가짐부터 달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엔 미련스럽게도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당시엔 내게 충격적이었던 조리도구가 담겨있던 학교 tool bag.


 

소집일에 지급받았던 조리복. 학교 문양이 곳곳에 박혀있다.

 

드디어 학업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지고 출발선에 섰다. 이제까지의 여정과는 수준이 다른 본격적인 내 인생의 2막이 그렇게 지구 반대편 시드니 땅에서 시작되고 있었고 나는 전력을 다해 그 길을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호주로 이민을 간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