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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Aug 30. 2021

독서는 위험하다.
위험한 독서가 나를 지탱한다.

이기철, 《정오의 순례》, 〈위험한 독서〉

모든 사유는 흰 종이 위를 지난다

때론 겨자씨처럼 때론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끝없이 말을 걸어오는 글자들이 나는 두렵다

종달새가 남기고 간 백지 위의 고백들

은빛 칼날 스치고 간 맨살 위의 붉은 피

···

독서는 종이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백지의 입인 글자들은 천의 혀로 노래한다

···

때로 질투도 인간적이다

나는 열 번의 봄이 같은 꽃을 피운 것을 본 일이 없다

오늘의 구름은 어제의 구름이 아니다

작년의 작약은 올해의 작약이 아니다

시는 이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

독서가 가르치는 계단은 너무 높은 데 있다


_이기철, 〈위험한 독서〉



시인은

지금 책을 읽는다.

너무 많은 책을 읽는 것은 아닌지 묻는.

독서는 위험하다.


시인은

위험한 독서가 자신 지탱한다며

책 읽기를 권한다.

독서는 위험한데도 말이다.   


어떤 말이 내게 들어오고 어떤 말이 나를 떠나는가

문맥과의 결별은 즐거움인가 슬픔인가

글을 읽으면 내 몸이 생각의 물속에 잠긴다

사유와 청류와 탁류로 뒤섞인다

독서는 위험하다

위험한 독서가 나를 지탱한다


시인은

글을 읽으면 고전과 신서의 바다에

자신의 몸이 잠긴다.

늙은 세월과 신생의 시간과 악수한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어우러진다.


시인은

(그 말에) 천천히 중독된다

그럼에도,

시인을 지탱하는 것은

아편의 말들이다.

이 중독에 취하고자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자’ 면 ‘토론하자’고 한다.

‘글을 읽자’ 면 ‘돈 되느냐’고 묻는다.

‘불교를 하자’ 면 ‘학과 공부하듯 하는 것’인 줄 안다.

그거 말고, 그런 거 말고

글을 읽고 공부를 하고 붓다를 온전히 만날 방법은 없을까?

우리는 모두 계단을 오르려고만 한다.

계단에서 내려와 올봄의 빛깔이 작년의 봄 빛깔과 같은지 다른지 그것부터 말해보자.


나는 열 번의 봄이 같은 꽃을 피운 것을 본 일이 없다

오늘의 구름은 어제의 구름이 아니다

작년의 작약은 올해의 작약이 아니다

시는 이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

독서가 가르치는 계단은 너무 높은 데 있다


_이기철 시인의 시 <위험한 독서> 중에서



같은 시로 쓴 짤막한 칼럼이다. 제목은 ‘독서의 계단에서 내려오라’. ‘이미령의 詩詩한 주말’이라는 매주 한 편의 시로 ‘詩詩한’한 이야기를 하는 칼럼이다. 지금은 그저 옛글로 찾아볼 뿐이다. 이 칼럼 첫 번째 연재에서 “시 한 수를 고스란히 올려놓으면 저작권에 저촉이 되니, 반드시 시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충고를 들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문이 닫힐 판이다.”라는 푸념 어린 글로 시작했다.


다시, 이기철로 돌아와서

“책을 읽자면 토론하자”라고 하고 

“글을 읽자면 돈 되느냐”라는 반문은 많이도 들었고, 

많이도 하기도 한 이야기다.

“그거 말고, 그런 거 말고” 그저 나를 지탱하기 위하여 책을 읽는 것이다.


매번 봄마다 다른 꽃을 피운다. 

시인은 

“나는 열 번의 봄이 같은 꽃을 피운 것을 본 일이 없다.”

어제의 구름과 오늘의 구름은 늘 같지 않다.

시인이 말하는 시는 어렵다. 

“시는 이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


우리가 오르고자 하는 독서는 너무 높이 있다.

“독서가 가르치는 계단은 너무 높은 데 있다.”



어떤 말들이 내게 들어오고 어떤 말들은 나를 떠난다

내 뇌리는 문장의 통로

문맥과의 결별은 즐거움인가 슬픔인가

글을 읽으면 고전과 신서의 바다에 내 몸이 잠긴다

사유가 청류와 탁류로 뒤섞인다

늙은 세월과 신생의 시간이 악수한다

나는 천천히 중독된다

아편의 말들이 나를 지탱한다


_이기철, 〈나는 읽는다〉




이기철 (알라딘 소개)


1943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영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2년 「현대문학」으로 시단에 데뷔했고, 1976년부터 '자유시' 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수영문학상(1993), 후광문학상(1991), 대구문학상(1986), 금복문화예술상(1990), 도천문학상(1993) 등을 수상하였다. 대구시인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영남대 명예교수이다.


시집으로 <낱말 추적>, <청산행>, <전쟁과 평화>, <우수의 이불을 덮고>, <내 사랑은 해지는 영토에>, <시민일기>,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열하를 향하여>, <유리의 나날>, <청산행>, <가혹하게, 그리운 여름> 등이 있다. 이밖에 소설집 <땅 위의 날들>, 시론집 <시를 찾아서>, 비평서 <인간주의 비평을 위하여>, 학술 저서 <시학>, <작가 연구의 실천>, <분단기 문학사의 시각>, <근대 인물 한국사, 이상화>, 편저로 <이상화 전집>, 산문집 <쓸쓸한 곳에는 시인이 있다> 등이 있다.



덧_

이기철, 《정오의 순례》, 애지, 2006년 12월 초판 2쇄

이미령, 이미령의 詩詩한 주말, 독서의 계단에서 내려오라, 불교포커스

《현대시학》,  200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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