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공감을 끌어내는 글이 자유기고가의 목표이다
밥벌이한다는 건 무슨 일이건 힘들고 고되다. 자유기고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유와 생계는 어울리지 않고 상반되는 말이다. 직업에 ‘자유’라는 이름이 들어가니 구속받지 자유롭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자유기고가는 무작정 환상적인 직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디 쉬운 밥벌이가 있겠는가.
저자의 이야기다. 자신의 이야기를 팔려면 공감을 얻어야 한다. 그 공감을 얻기 위한 저자의 약(?) 팔기 기술이다. 저질스럽다거나 나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지금도 당연히 자신의 강점을 팔아야 하지만 그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유기고가로 먹고 살기》라는 제목을 가진 책의 독자가 누구일까? 글을 지지리 못쓰지만 현재 지옥철에 매달려 출근하는 많은 ‘글린이’, 글줄이나 쓰지만 돈벌이로 연결하지 못하는 이들, 타깃은 이들일 것이다. 그 외에 ‘자유’라는 말에 오늘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원하는 지나치는 사람들이 걸려들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자유기고가!
자유와 생계라는 말은 어찌 보면 상반되는 단어다. 마냥 자유로우면 생계가 곤란하고, 또 생계를 이어가려면 상당 부분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 직업은 자유로우면서 생계까지 보장되니, 어쩌면 ‘꿈의 직업’이 아닐까.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꿈의 직업’이란다. 가기에 ‘자유’롭기까지 하다니, 흥미롭다.)
내가 ‘자유기고가’로 자유롭게 일하며 생계를 이어 온 지 올해로 꼭 12년이 되었다. 강산이 한번 바뀐 세월이니, 이 직업의 생리는 속속들이 꿰고 있는 셈이다.
(10년을 넘게 생계를 이어왔다고 하니, 좀 신뢰가 간다. 조금 신뢰를 해보아도 되지 않을까? 커피 한잔인데 함 사서 읽어 볼까? 구미가 당긴다.)
다행히도 나는 ‘자유’와 ‘생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 여기서 ‘자유’는 부질없이 남아도는 시간을 뜻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책임을 지고 노력하며 얻어내는 ‘일에서의 자유’이다. 이 ‘자유’라는 토끼를 한 눈 팔지 않고 부지런히 쫓아가니 ‘생계’라는 토끼가 저절로 따라왔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버는 행운 속에서 나에게 자유와 생계는 서로 상충되지 않고 어우러졌다.
(돈도 벌고 자유롭기까지 한 생활이구나. ‘자유기고가’라는 게 큰돈은 아니지만 생활은 되나 보구나. 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활도 된다는데, 사실 생활이 된다고는 하지 않았다. 돈을 번다고 했다. 그 돈이 꼭 생활이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유’라 말하지 않는가. 일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장바구니에 갈 것도 없이 바로 구매를 해야겠다. 속아봐야 밥 한 끼다. 한 끼 더 굶는다고 죽기야 하겠어.)
일기를 포함하여 모든 글은 독자가 존재한다. 자신의 관점에서 쓰기보다는 상대의 관점에서 써야 한다. 자유기고가로 먹고살든 아니든 글을 쓰려는 이에게 도움이 되는 말이다. 즉, 좋은 글과 나쁜 글은 읽는 상대방에 의해 결정된다.
자유기고가의 글은 100% 독자를 위해 존재한다.
내 글에 시간과 돈을 내는 독자에게 ‘돈 아깝다’, ‘시간 낭비’라는 느낌을 준다면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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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히 타의적이며 대중적이어야 한다.
취재할 때도 ‘내 시각’이 아닌 ‘독자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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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자.
무엇을 좋아할까, 무엇을 궁금할까, 어떤 정보를 전달해야 유용하게 쓸 수 있을까?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공감을 끌어내는 글이 자유기고가의 목표이다.
자유기고가로 먹고사는 방법에 관한 책이 아니라 자유기고가로 먹고사는 이야기다. 둘의 차이는 크지 않지만, 독자의 기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저자와 출판사의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자유기고가를 생각하고 책을 읽는다면 큰 기대를 하지 마라.
자유기고가로 밥벌이하는 저자를 생각하니 김훈이 떠오른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자유롭고 쉬운 밥벌이는 없다.
덧_
허주희, 《자유기고가로 먹고 살기》, 왓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