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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Jul 15. 2021

노벨 경제학상은 노벨상이 아니다

알프레드 노벨을 기리는 경제과학 분야 스웨덴 중앙은행상

노벨상은 지구 상에 현존하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상금을 많이 주는 상이다. 노벨상은 “인류 복지에 공헌한 사람을 기린다.”라는 1901년 노벨의 유언에 따라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평화 5개 부문에 수여한다. (노벨상도 그놈(?)의 술책이라는 음모론의 주장도 많다. 여기서는 잠시 접어두자.)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노벨 경제학상이다.


1961년 스웨덴 중앙은행 창립 3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노벨 경제학상’을 만들었다. 실제 명칭은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스웨덴 중앙은행 경제학상(Nobel Memorial Prize in Economic Sciences)’이라는 긴 이름이다. 재원도 스웨덴 중앙은행 300주년 기금으로 조달한다.


현재 노벨 경제학상은 사회과학 분야에 주어지는 거의 유일무이한 상이라는 지위 때문에 권위를 인정받는다. 이에 따른 권위, 인세 그리고 강연 등 많은 혜택이 생긴다. 어떤 식으로든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권위 있는 상은 있어야 한다. 대중은 언제나 권위를 원하기 때문이다. ‘노벨 경제학상’이 그만한 권위가 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언론, 학계 그리고 실물경제를 엮어 권위를 활용하는 방법의 대표적인 예이다. 서구에 맞는 이론을 선택한 후 실물을 움직여 해당 이론에 힘을 주고, 언론을 이용해 바람을 잡아 권위를 부여한 후, 마지막엔 대중을 굴복시킨다. 이때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하는 것이 노벨 경제학상이다. 권위를 위하여 그들은 ‘노벨 경제학상’ 같은 것이 필요하다.


경제학상에 대한 논란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서 발생한다. (위키백과)

노벨의 유언에 명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벨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시상 과정의 유사성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신진보 경제학에 대한 명시된 차별이 있었는가?

경제학과 같은 사회과학에서 객관적인 평가가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에 비해 더 어려운가?

대부분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가 70년대와 80년대 초에 수상한 이후로 수상할 수 있는 후보들이 많이 약해지고, 그리하여 시상에 대한 논란이 가중되었는가?


아이러니하게도 노벨 경제학상에 대해 가장 활발하게 비판을 가하는 사람 중 하나는 노벨 가문의 한 사람인 피터 노벨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수상자 선정을 맡고 있지만, 노벨 경제학상 재원은 스웨덴 국립은행에서 제공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 2001년 노벨상 제정 10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알프레드 노벨(자손이 없다)의 형 루트비히 노벨의 증손자들은 ‘노벨이 경제학상을 원했다면 스스로 만들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라며 노벨 경제학상에서 ‘노벨’  이름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증손자 중 한 명인 피터 노벨은 노벨경제학상에 대해 “명성을 높이려는 경제학자들의 홍보 행위”이며 “상은 대부분 주식시장 투기꾼들에게 주어진다.”라고 비난한 바 있다. 노벨 경제학상이 국제금융 세력이 만든 ‘그들만의 잔치 놀음’이라는 일각의 의혹 제기를 연상케 하는 지적이다. “스웨덴 중앙은행이 노벨이라는 상표를 도용했다. 주식시장과 옵션 투기를 조장한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이 상을 휩쓸고 있다. 이는 인류의 복지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상을 수여한다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지에 어긋난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수상자 편중도 논란이다. ‘남자, 미국인, 시카고대, 유대인’ 위주라는 비판을 자주 받는다. 다른 노벨상보다 편중 현상이 심한 편이다.


비약은 있지만 71년 닉슨의 달러 금 태환을 정지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69년 노벨 경제학상을 만들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대부분의 수상자가 미국 주류 경제학자(당시는 아니지만 주류로 편입하는)라는 사실이 노벨 경제학상의 또 다른 이면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해 경제학상 수상자의 면면을 살피면 앞으로 도래할 경제의 흐름을 알 수 있기도 하다.




Nixon shock 닉슨 쇼크: 미국 달러와 금 태환 제도 폐지


닉슨 미 대통령은 1971년 8월 15일 특별연설에서 새로운 경제정책을 발표했다.

① 국제통화 투기업자들로부터 달러화를 보호하기 위해 사실상 달러의 유동 환율과 나아가서는 재평가를 의미하게 되는 달러의 금태환을 중지

② ’인플레’를 억제하기 위해 미국의 외원액을 10% 삭감

③ 90일 동안 임금·물가를 동결


닉슨 대통령은 고용의 증대와 인플레를 억제하며 국제통화시장에서 달러화의 지위를 방위하는 등의 3대 경제목표를 설정하고 저조한 미국 국내 경제를 부활시키기 위해 ‘전쟁 없는 번영’을 이룩하겠다고 다짐했다.


1971년 미국은 베트남 전쟁 비용을 대느라 국고가 바닥을 드러낼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유럽과 일본의 수출공세에 무역 적자마저 쌓여갔다. 세계는 미국의 금 지급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일요일이던 8월 15일 밤 금 태환 정지를 전격 선언했다. 1944년 미국 주도로 2차 대전 후 세계 경제 질서를 재편한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하는 순간이었다.


달러 패권을 지키기 위한 초강수였다. 이때부터 달러 지폐에서 “금화와 교환할 수 있다”는 문구가 사라졌다. 세계 경제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당장 인플레이션 공포부터 덮쳤다. 때마침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1차 오일 쇼크가 지구촌을 강타했다. 미국은 이때 사우디아라비아를 움직여 원유의 달러 결제를 이끌어냄으로써 달러 헤게모니를 뒷받침했다.


브레튼우즈 체제.


2차 대전 직후에 형성된 국제 통화 체제를 가리킨다. 

1930년대 각국의 경쟁적 통화절하 조처로 무역전쟁이 벌어지고 급기야 2차 대전으로까지 이어지자 1944년 서방 44개국 지도자들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 모여 입안해 ‘브레튼우즈 체제’를 출범시켰다. 이 체제는 ‘1온스 = 35달러’ 비율로 달러와 금 태환을 보장하고, 영국 · 독일 · 일본 등 주요국 통화는 달러를 매개로 금 태환을 보장받는 ‘조정 가능한 고정환율제’이다. 달러가 매개가 된다는 점에서 달러를 ‘기축통화’로 했다. 그 운영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이 만들었다.


미국의 달러만 금金과 고정 비율로 태환兌換할 수 있는 반면, 다른 통화들은 금 태환 대신에 달러와 고정 환율로 교환할 수 있게 돼 있었다. 달러는 ‘기축통화’였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는 대외 준비금으로 금이나 달러를 보유했는데, 금의 공급 증가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증가했다. 이 체제는 세계 경제에서 미국의 확고한 경제적 우위와 달러 가치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만 유지될 수 있다.




_참조한 

투자, 음모를 읽어라(해냄, 2010)

음모론(이마고, 2007)

유태인의 세계 정복 음모(현대 공론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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