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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Dec 08. 2021

각자의 이익에 의해 분류하고
나뉘어진 인종주의

우리는 인종주의라는 문제를 백인과 흑인이 섞여 사는 먼 나라의 일로 생각하거나 인간의 이성이 채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나 있었던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인종주의는 일상생활에서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며 오늘날 개인의 사고방식에서부터 국제질서에 이르기까지 이미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문제이다. 곧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종주의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종을 구분하는 것은 자의적 판단이 적용된다. “현재 백인이라도 조상 중에 단 한 명이라도 흑인이 있다면 흑인으로 분류한다.”라고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혈통법’에 정의한다. 1970년 “흑인의 피가 32분의 1 이상 섞여 있으면 흑인으로 분류한다”라고 개정하였다. 33분의 1이 섞인 사람은 백인으로 분류한다는 말이다. 우스운 일이다.


인종주의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중세를 넘어 근세로 넘어서면서 제국주의와 초기 자본주의 태동할 무렵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러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태인을 차별한 것은 인종적 우열을 따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 예수를 인정하지 않고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게 더 강했다. 역사란 참으로 아이러니해서 이러한 차별로 인하여 유태인은 금융과 자본을 독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다른 민족을 차별한 것은 ‘문화’가 떨어져 미개하다는 것이다.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개념이지 인종으로 구분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것이 자본, 제국주의와 더불어 교회가 결탁하여 인종주의를 만들어 냈다. 값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제도는 노예제도이다. 고대에 존재하던 노예제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타당한 이유와 학설이 필요했다. 다양한 과학적(그때는 이런 미개한 것을 과학이라고 했다. 사실은 과학적이지 않지만)인 근거로 인종을 분류했다. 여기에 다윈의 ‘종의 기원’을 악의적으로 해석하여 인종주의를 만들어 냈다.


인종주의는 자본주의 탐욕과 병폐의 한 산물이다.


식민주의 확산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임금을 지불할 필요 없는 아프리카인(흑인이라고 부르는 자체가 인종주의의 산물이다)이 그 대상이 되었다. 더불어 막대한 이익을 낼 수 있는 인간 사냥을 더욱더 부채질하였다. 자본의 이익만을 위하여 인종을 분류하고 그 분류로 노예가 타당하다고 하였다. 이에 교회는 자신의 자리 보존을 위해 묵인하였다. 만인은 평등하다는 논리는 그들이 인간일 때만 해당된다. 교회는 그들이 인간이 아님을 인정하고 노예제도를 묵인, 아니 더 동조하였다.


식민주의가 확산됨에 따라 아시아인의 미개함과 열등함을 개화, 선교하여야 한다는 명분으로 아시아를 정복한다. 이 점도 자본의 논리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의 병폐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땅 한반도도 자본주의의 병폐가 만연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콜럼버스 이래 다양한 문화 간 교류가 늘어나면서 인종주의가 시작되었음을 생각해볼 때 현재 진행 중인 세계화와 이민이 물결은 더 많은 갈등과 더 심각한 인종주의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현대에 살고 있다. 인종주의의 나쁨을 알고, 느끼고 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의 하나하나를 보면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종주의 변형인 신인종주의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우리의 인종주의는 언제 생겨났을까? 오래되지 않는다. 거슬러 개화기의 선각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우리에게 인종주의를 전파하였다. 서양인이 주장하는 인종주의를 비판 없이 받아들여 열등한 아시아인이 일본을 중심으로 뭉쳐서 서양에 맞서야 한다고 해 대부분 친일로 들어선다. 그들에게 친일은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다문화주의:

각자의 문화를 존중해주자는 문화다원주의에서 영감을 얻어, 사회 안에서 인종 · 종족 ·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상을 말한다. ··· 다양성을 관리 · 통제하려는 차원에서의 대응이라는 비판이 있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어떠한가? 


첫째, 관주도형 다문화주의다. 사회의 안정, 질서, 통제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정부의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다문화주의 정책으로는 이주자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기 어렵다.(유하게 표현하였지만 '없다'라고 본다.)


둘째,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역설적으로 다문화적이지 않다. 즉, 한국 문화로의 동화만을 추구하는 정책이다.


셋째, 대상 집단을 차별화하는 다문화주의다. 정부의 다문화 정책은 결혼하여 이주해 온 사람, 그것도 여성과 그 자녀만을 대상으로 한다. 많은 이주 노동자에 대한 정책은 전혀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불법 체류하는 미등록 노동자의 권익 보호보다는 단속과 추방으로 일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문화만 있는’ 다문화주의다. 자기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 권리나 법으로 규정된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실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한국에서 ‘단일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다름’에 대한 경계심과 배타성으로 나타났고, 다른 인종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인종주의적 태도를 형성했다. (어느 틈엔가) 인종주의는 나쁘다는 인식만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제 우리는 다문화주의를 찬양하고 있다.


과연 제대로 된 비판 없이 지나간 인종주의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인종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온 의식 구조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비판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사회 · 경제 · 정치적으로 소외된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품어 안아 주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인종주의와 그 변형인 신인종주의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덧_

《인종주의》, 박경태, 책세상, 2009년 4월 초판 1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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