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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루장 Dec 08. 2021

집은 사는(買) 것인가,
사는(住) 곳인가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 _르 코르뷔지에


누구나 자신이 살 집을 꿈꾼다. 멋진 집, 좋은 집, 전망 좋은 집을 꿈꾼다. 하지만 집은 삶이다. 삶을 담은 집이어야 한다.

왜? 집을 꿈꾸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집이어야 한다.


건축주에게 “어떤 집을 원하느냐”라고 물으면 선뜻 돌아오는 대답이 “멋진 집”이랍니다. 그런데 “어떤 집을 원하느냐”라고 되물으면 건축주의 말문이 막힌답니다. 자신이 원하는 집에 대한 구체적인 상이 없다는 거지요. 어떤 건축가는 “매일 군복 입던 군인에게 사복을 입으라 하면 당황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더군요. 군복같이 천편일률적인 아파트에 살던 사람이 자신의 개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복 같은 단독 주택을 지으려 하니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는 겁니다.


아파트가 중산층이라는 것을 대변하는 시기가 있었다. 아파트는 ‘삶을 담은 집’이 아니다. 중산층이 되기 위해 아파트를 샀지만, 지금은 ‘하우스푸어’다. 이런 이에게 자신이 원하는 집이란 상상하지 못한다. 막상 자신의 집을 지을 여유가 생겨도 그저 멋진, 좋은 그리고 남에게 보기 좋은 집일 뿐이다.

“삶을 닮은 집, 삶을 담을 집”이 필요하다. 집은 사람이 사는 게 목적이다. 좋은 그림을 자주 보면 그림 보는 안목이 늘듯, 좋은 집을 자주 본다면 자신이 정말 원하는 집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있다.

건축주가 건축가가 되어 지은 집이 있다. 오랜 시간 천천히 만들었다. 재료도 컨테이너를 이용해 꼭 필요한 것만 갖춘 주말주택이다. 건축주는 “왜 집을 짓는지 용도를 분명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 용도를 분명히 한다는 건 내가 은퇴하고 늙을 때까지 지내면 되는 집인지, 자손에게 물려줄 집인지. 그것에 따라 집의 재료가 달라진다.”라고 말한다. 왜 집을 짓는지에 관한 충분한 생각 없이 집을 지을 때 집은 사람이 사는 게 아니라 집이 사람을 데리고 사는 게 된다.


이제, 집은 사는(買) 것이 아니라, 사는(住) 곳이다.


덧_

《삶을 닮은 집, 삶을 담은 집》, 김미리, 박세미, 채민기, 더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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