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13년 간 조선에 억류되었다가 힘겹게 탈출해 일본을 거쳐 네덜란드 본국으로 돌아간 하멜 일행은 동인도 회사에 그동안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했고 이에 대한 증거로 써서 낸 보고서가 《하멜 표류기》이다. 보고서 중 《조선왕국기》가 있다. 우리가 부르는 이름과는 다르게 원제는 《스페르베르호의 불운한 항해 일지》이다. 이러한 의도와는 별개로 일본과 교류 중이던 네덜란드는 근접국인 조선에 대한 지형, 날씨, 특산물, 환경 그리고 민족성 등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는 보고서를 기반으로 향후 교류 또는 침략에 이용하려 했다.
하멜의 귀환 후 네덜란드는 조선과 직교역을 계획하고 코레아호라는 배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새로운 시장 개척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교류 중이던 일본의 반대로 조선과 직접 교류는 포기하였다. 당시 일본은 대마도를 통한 중계무역으로 재미를 보고 있었다.
하멜은 조선에 체포되어 있는 동안 구경꾼의 대상이었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 표류한 사건 이후 무엇을 반성해야 할까? 38명이나 되는 이들 집단을 대상으로 조선 정부는 어떤 구체적인 서양 기술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이를 본격적으로 탐구하려 했다는 흔적도 없다. 한참 전 화란인 박연이 군대에 소속되어 대포나 기술의 전투술을 가르쳐준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조정은 이들의 기술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들로부터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거나 정보를 활용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고 있다.
하멜은 조선에 있는 동안 “우리는 이교도로부터 기독교인이 무색할 정도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표류해온 자신들을 인도적인 원칙 아래 잘 대접해준 제주목사 이원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들은 조선인이 손님을 대접하는 풍속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나그네가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는 여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길을 따라 여행하다 날이 저물게 되면, 양반집 이외에는 아무 집이나 안마당으로 들어가서 자기가 먹을 만큼의 쌀을 내놓습니다. 그러면 곧 집주인이 이 쌀로 밥을 지어 반찬과 함께 나그네를 대접합니다. 집집마다 순번을 정해 나그네를 대접하는 마을이 많은데, 이에 대해 어느 집도 군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당시 종교에 관해서도 “조선인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고, 개종(改宗)을 요구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들은 중국인과 똑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서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각자의 생각에 맡긴다”라고 답변했다.
병에 걸린 조선인이 하는 행동에 대해 자세하게 적고 있다. <민족성>이라는 부분으로 생활상을 기록하고 있다. 하멜 일행의 눈으로는 좋게 보지 않았다. “코레시안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들은 되지 못합니다. 남을 속여 넘기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아주 잘한 일로 생각합니다. 한편 그들은 착하고 남의 말을 곧이듣기 잘합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들에게 우리말을 믿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낯 모르는 사람 특히 중을 좋아합니다.”
전염병에 대하는 조선인에 관한 묘사가 있다. “피를 싫어합니다. 병에 대해 커다란 혐오감을 갖고 있고, 특히 전염병에 대해 그렇습니다. 전염병에 걸린 경우 곧 환자를 집에서 운반해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이나 고을 밖으로 실어 내며, 들판에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든 조그만 초가집으로 데려갑니다. 돌보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접근하거나 말을 걸지 않습니다. 도와줄 친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그대로 죽어 버리고 맙니다. 전염병은 소나무 가지로 울타리를 만들어 집이나 마을로 접근하는 것을 금하며,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전염병에 걸린 집의 지붕 위에 가시나무를 덮어 놓습니다.”
문자와 언어에 대한 부분은 흥미롭다. “코레아의 말은 다른 모든 언어와 다릅니다. 같은 사물을 표현하는 데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에 배우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대개의 사람은 말을 매우 빨리하지만, 양반이나 학자들은 천천히 말합니다.” 하멜 일행은 한글인지 모르고 기술하였지만, 설명은 흥미롭다. “여자나 평민이 사용하는 글자입니다. 이 글자는 배우기 쉬우며, 모든 것을 다 쓸 수 있습니다. 전에 한 번도 들어 본 일이 없는 이름을 다른 글자보다 쉽고 더 정확히 적을 수 있는 글자입니다.”
청나라 사신의 방문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많이 사대적인 상황이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상황이 전쟁이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았기에 청나라에 극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타르타르(청나라를 말함) 사신이 도착하면, 국왕은 친히 대신을 데리고 도성 밖까지 그를 영접하러 나가며 경의를 표하기 위해 깊은 절을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사신을 숙소로 모십니다. 사절이 도착하고 출발할 때는 국왕에게 행해지는 것보다 더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사신을 보낸 황제에 대한 존경심에서, 그리고 사신의 입에서 불평이 나오지 않게 하려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사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환대해 줍니다.”
하멜이 작성한 보고서는 하멜 일행이 단편적인 경험과 전해 들은 이야기이고 편협한 눈으로 본 것이기에 사실을 그대로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이 개항 전 조선이 서양에 소개된 유일한 자료이기에 이것을 근거로 조선을 판단했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조선을 탈출해 규슈 해안에 표착한 하멜 일행은 일본의 개항장開港場인 나가사키로 압송되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그곳의 일본 행정 책임자는 그들에게 난파선 규모 및 항해 목적, 조선의 군사 · 경제 · 풍습 · 종교, 탈출 경위 등을 비롯해 5개 분야 총 54개 항을 집중적으로 심문했다. 일본은 하멜 일행을 통해 하멜이 억류 기간 동안 조선에서 보고 듣고 느끼 것을 기록했다. 일본은 단 시간에 조선의 많은 것을 얻었다.
숭명 배청의 기치를 들고 북벌 계획을 진행하고 있던 효종이 하멜 일행을 받아들이는 것을 계기로 서구 세계에 대한 정보와 그들의 과학 기술을 축척하고 개항에까지 나아갔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17세기 화란국은 세계 최강의 국가이고 세계 교역의 주도군을 가진 강대국이었다. 당시 왜국(일본)의 상태를 파악하고 하멜 일행을 활용하고 화란국(네덜란드)과의 교역으로 새로운 조선을 맞이할 수 있는 계기가 충분히 될 수 있었다.
만약 조선과 직접 교류하려던 화란의 계획이 무리 없이 진행되고 조선 왕실이 허용했다면 일본이 본격적인 서구 근대화로 가기 이전에 착실히 닦았던 난학의 기회를 우리도 가져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정에 불과하다.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하고 나서 2세기가 지난 뒤, 한반도의 역사는 일제에 의한 치욕적인 식민통치라는 파국을 맞는다.
역사는 가정이 없지만, 우리 역사에서 위화도 회군만큼 치명적인 실수가 하멜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응이다. 만약, 대응이 달랐다면 19세기 말 20세기 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덧_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강준식, 웅진지식하우스
《21세기 우리 문화》, 주강현, 한겨레신문사
하멜의 표류기일까 조선의 표류기일까?, 박종선 (인문학 칼럼니스트)
《장정일 독서일기 5》, 장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