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을 다시 읽다.
예전 블로그의 글 중에서 강유원을 다시 읽다. 왜 지금 강유원일까. 예전처럼 인구에 오르지는 않는다. 책도 많은 게 절판이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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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첫머리는 책을 읽지 않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사람을 상대로 인문학에 대해 떠들 수는 없다. 그러면 책은 어떤 사람이 읽는가? 병든 사람이 읽는다. 병든 인간들, 이들이 인문학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 책이 바라보는 인간을 서술하고 대상 독자를 한정한 다음에 인간과 텍스트, 콘텍스트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 _책과 세계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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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책을 읽은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해서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대다수 사람이 행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이 틀림없다. _《책과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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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이 말하는 내가 공부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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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이 말하는 다섯 단락 에세이 쓰기에 대하여를 읽고 고민에 빠지다. 다시 돌아본다.
다섯 단락 에세이 쓰기에 대하여
1) 전체를 아우르는 서평을 쓰지 말 것.
2) 처음에는 단면을 잘라내서 써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많은 챕터 중 자신이 쓰고 싶은 1, 2 챕터만 골라본다)
3) 그 안에서 크게 3개 정도의 소주제를 잡아 각각 2, 3, 4번째 단락을 구성한다.
4) 마지막 단락은 결론을 쓴다. 하지만 결론에 자신이 없으면 꼭 안 써도 된다.
5) 결론은 더 논의해야 할 부분을 써도 되지만 느닷없이 미사여구나 멋진 말로 끝맺음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글의 힘을 떨어뜨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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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에 대하여 궁금증이 더하여 검색 중 읽게 된 포스트 강유원 게시판의 비극
노정태의 비판 아니 (글이 아니라 그저 말이다) 말은 1% 공감한다. 나머지 99%는 개뿔. 1%라도 공감하는 것은 “자신을 지지하던 사람 중 상당수가 진정 인문학을 소비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강유원을 지지하는 사람뿐 아니라 많은 먹물이 인문학을 밥벌이 도구로 소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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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일본 · 단테의 신곡에서 인수위의 영어정책과 ‘번역’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같은 의견의 로쟈의 번역을 하면 뭐가 좋은가를 볼 수 있다. ‘번역’은 우리가 일본을 따라갈 수가 없다. 왜일까?
나는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라는 책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알려졌듯이 일본은 번역이 앞선 나라다. 그러면 왜 이렇게 번역을 열심히 하는 걸까? 이 책에서 본 내용을 말해보겠다.
1800 년대 후반 일본에서 모리 아리노리라는 사람이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바바 다쓰이라는 사람은 “일본에서 영어를 채용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상류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되고 말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런 주장이 점차 힘을 얻어 일본은 ‘번역 주의’라는 입장을 택하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 뭐든지 번역되어 나오는 일본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번역하면 뭐가 좋은가. 자기네 나라말로 편하게 읽으니까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번역이 습관 되면 그것은 단순히 문헌 번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문물 전반을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것으로 ‘번역’하게 된다. 일본의 이러한 번역 주의는 세월의 두께를 얻으면서 서구의 근대를 나름대로 소화하여 독자적인 근대를 이룰 수 있게 한 정신적 바탕이 된다. 이것이 사실 오늘날 일본을 선진국으로 만든 힘일 것이다.
참고로 서평가(라고 하면 기분 나쁠까? 철학자)로서의 강유원의 Book 소리를 보면 좋다. 책에 대한 그의 단상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책을 빌린 ‘잡다(?)한 소리’이다.
강유원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낀다. 또 로쟈의 블로그에서 많은 것을 보고 있다. (‘느낀다’와 ‘본다’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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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 이유는 그 시대의 거대한 시간을 살아보기 위해서다.
_《인문고전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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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책 《책과 세계》에 대한 변.
“세계적 고전을 중심으로 책 속에 담긴 의미와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흥미롭다.
나는 이 책을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썼다. 하나는 고전에 대한 자극을 주면서 그것으로 직접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고, 다른 하나는 그 책을 읽기 전에 미리 그 책이 어떻게 서로 이어져 있고 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목적이든지 이루어진다면, 이 책은 불필요해진다. 결국 이 책은 잊히고 버려지기 위해 쓰인 셈이다.
책을 쓴 이유이다. “결국, 이 책은 잊히고 버려지기 위해 쓰인” 것이라 하였지만, 그의 논리대로 한다면 이 책은 인류가 망하는 날까지 읽히고 팔려야 하는 책이다. 왜냐하면, 그가 말한 목적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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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어진 링크 공부하는 가족의 2014년 마지막글을 보고,
글이 의미 있는 게 아니라, 읽는 이가 의미를 둘 뿐이다.